교통40&교통신문40=<10>1974년 역사적인 서울지하철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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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교통신문40=<10>1974년 역사적인 서울지하철 개통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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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개통 이은 '제2의 교통혁명'

수도권 98.6km 운행 동양서 두 번째
경부선 열차 1980년까지 전철화 추진
GMK, 자동차국산화 위해 설비 확충

1974년 6월20일 김종필 국무총리는 경제장관들을 대동, 영등포에 있는 ‘동양워너공업’(사장 한창근) 공장을 시찰하고 생산시설과 작업공정을 돌아본 후 “정부가 추진하는 자동차국산화정책이 빨리 실현되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하면서 종사원들의 노고를 격려했다.
이 무렵 GM코리아(사장 김창원)는 국내최대의 엔진공장을 완공하고 6월부터 연 5만대의 제품을 생산키로 피치를 가하고 있었다.
GMK는 1972년 6월부터 내외자 65억원을 들여 연산 5만대의 엔진주물 및 기계공장을 세워 본격적인 생산활동에 들어갔다. 인천시내 50만평 대지 위에 건설된 5600평 공장에는 주물용탕 능력만도 연 1만2000t에 달했다. 만 2년에 걸쳐 완공을 본 이 엔진공장에서는 연간 1200cc, 1900㏄ 등 엔진 5만대를 생산, 반은 수출하고 반은 내수용으로 공급할 예정이었다.
GMK는 이밖에 방계공장인 부산의 대원공장과 버스공장 및 부평의 조립공장도 엔진공장 완공과 때를 같이 해 시설을 대폭 확장, 재정비하고 자동차국산화 100% 목표를 향해 마지막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특히 버스공장은 1억2000만원을 들여 라인을 전면 재배치하고 시간당 버스 1대씩을 생산할 수 있는 자동화설비를 추진했다.
대원공장은 기존의 1500t, 3000t 오일프레스 외에 300t, 500t급 메카니커프레스를 도입, 각종 트럭, 버스 등의 프레임, 카고보디·프레스부품을 한 달에 1000∼1500대 분을 생산할 수 있도록 확장했다. GMK의 김창원사장은 한국기계도 인수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1937년 일제 때 조선기계제작소로 출발, 한 때는 잠수함까지 만들었으나 1968년에 신진자동차가 인수하면서 디젤엔진생산전문업체로 탈바꿈해갔다. 당시 범국가적 차원에서 추진됐던 이 디젤엔진공장은 서독 재정차관 114억 원과 국내자본 63억원을 투입해 기존공장을 대대적으로 확충, 디젤엔진국산화에 주력했는데 이 해 9월부터는 연간 2만4000대의 대형트럭, 고속버스, 선박용 엔진을 생산, 1977년까지는 100% 국산화가 가능했다.
신진그룹의 김창원 회장은 “한국기계공업을 주력기업으로 중점 육성하겠다”고 다짐하고 신진자동차공업과 3개 계열합작회사인 GMK, 코리아스파이서, 신진지프를 제외한 8개 계열회사는 합병 또는 처분, 1975년 말까지 정지작업을 완결짓겠다고 발표했다.
이 무렵 서울에는 지하철 1호선과 수도권전철공사가 완공됐다. 1974년 7월 서울역∼청량리 간 9.5㎞의 1호선 지하철을 중심으로 한 서울∼인천 간 38.9㎞, 서울∼수원 간 41.5㎞, 서울∼성북 간 18.2㎞를 잇는 총 98.6㎞의 수도권전철은 72년 4월 12일 착공돼 총 619억 원의 공사비로 만 3년4개월만에 동양에서 두 번째로 완공을 보았던 것이다.
고속도로 개통이 한국의 제1차 교통혁명이라고 한다면, 서울시내 지하철과 수도권전철은 제2의 교통혁명이 아닐 수 없었다. 서울시는 8·15개통을 앞두고 지하철운임을 8㎞까지 30원, 8㎞ 초과 매 1㎞마다 3원씩 가산토록 해 서울역∼청량리 간 운임을 30원으로 결정했다.
이 지하철의 역사적인 개통을 앞두고 4000여대의 서울시내버스, 경인간 48대의 고속버스, 230여 대의 시외버스 등 업계는 이용객을 지하철이나 전철로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제1호 종로선 지하철은 러시아워에는 5분 간격, 평시에는 7분 간격으로 시속 70㎞로 주행, 서울∼청량리 간을 18분에 운행, 이날 동시개통돼 연속 운행되는 수도권전철과 더불어 새로운 시민대중교통수단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8월15일 청량리지하역에서 정일권 국회의장 등 3부 요인이 테이프를 끊고 서울지하철과 성북∼서울역∼인천 간과 서울∼서울역∼수원 간의 수도권전철 시승행사도 가졌다. 지하철구간에는 서울역∼시청앞∼종각∼종로∼종로3가∼종로5가∼동대문∼신설동∼제기동∼청량리 등 8개 역이 마련됐고, 열차편성은 제어차가 앞뒤에 붙고 그 사이에 4량의 주전동차 등 모두 6량씩으로 연결되며, 승차정원은 제어차 148명(좌석 48), 주전동차 160명(좌석 54), 1개 열차당 936명이 정원으로 돼 있었으나 러시아워에는 정원의 230%인 2200명까지 태울 수 있으며, 하루 56만 명을 수송하게 돼 수도서울의 교통수송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됐다.
또 서울의 고민거리였던 인구 집중문제을 해소하는 분산책으로도 큰 역할을 했다.
서울시는 지하철 및 수도권 전철개통에 따른 교통대책으로 시내버스 노선개편계획 제1단계조치로 서울역∼청량리 간 경합구간과 수도권 경합구간의 연계수송을 위한 노선순환선의 증설 등 시내버스노선의 조정을 단행, 8월16일을 기해 일제히 변경운행토록 했다.
조정원칙은 지하철, 전철구간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 기점을 변경하지 않았고 시민교통편의와 순환노선의 증설과 연계노선은 인접 운행노선을 우선 활용하는데 주안점을 뒀다.
지하철의 역사적 개통에 따라, 지하철과 버스이용시민의 합리적인 연계수송체제를 위한 1단계 버스노선 조정은 모두 28개 노선의 933대로 전체 시내버스의 23%에 해당됐다.
조정내용은 서울역∼청량리 지하철구간 12개 노선을 전면변경, 청계천·을지로·율곡로 등으로 분산조치했고, 전철구간 5개 노선을 바꿔 3개 순환선의 증설과 지하철과의 연계수송을 위해 8개 노선(229대)을 신설, 기존 15개 노선(354대)과 함께 23개 방향에서 연계수송토록 했다.
한편 이와 함께 지하철구간의 버스정류장 14개 중 4개를 폐쇄하고, 존속정류장도 위치를 지하철역 입구로 변경 조치했으며 무질서했던 택시 승차장도 9개로 줄였다.
서울시에 이어 교통부도 수도권전철이 개통됨에 따라 경인·부천·수원·안양 등 도시를 권역별로 세분해 전철과의 거리, 주민 소득수준 및 운임, 통행목적과 전철의 서울도심권 통과이점을 감안, 약 30%정도가 전철로 넘어온 것으로 보고, 경인·경수간의 일부시외버스를 시내버스로 전환했다.
그리고 김신 교통부장관은 서울∼부산간 경부선 철도를 1976년에 착공해 1980년까지는 완전 전철화하겠다고 다짐했다.
경부선 철도의 전철화 필요성은 연간물동량 300만t이 1980년도에는 1500만t으로 400%가 증가되며, 여객은 4000만명이 8000만명으로 200%가 증가하게 되므로 효율적인 수송을 위해서 1978년까지 수원∼대전간을, 1980년까지 대전∼부산간을 연차적으로 전철화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72년도에 계획한 제2의 경부선 신설안을 백지화됐다.
본래 1972년도의 계획은 일본의 신간선을 본따 고속운행을 계획했던 것이다. 이 무렵 서울 시내 4개 노선에서 운행되던 시영버스 94대가 공개경쟁입찰에서 일반인에 낙찰돼 1∼2조로 나뉘어 모두 4억6000만원에 매각되었다.
9월18일 박정희 대통령은 대폭적인 개각을 단행했는데 교통부장관에 최경록(주영 대사)씨를 임명했다. 교통부 장관은 22대째를 맞이했다.
당시 교통신보는 1974년 8월15일 역사적인 서울지하철 개통과 관련, "일제 압박에서 해방된지 29년을 맞는 8·15 … 오늘은 우리 경제가 크게 성장하여 교통면에서만 보더라도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좁혀놓았고 점보제트기가 하늘을 나는데다가 서울에는 지하철이 생기고 인천과 수원 등 수도권을 전철로 연결, 교통혁명을 걸어온다는데서 더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는 뜻깊은 날이기도 하다."며 축하의 글을 실었다.
또 "공비 289억원 투입 연 110만명을 동원해 세계서 최단기 공사를 실현, 모두를 놀라게 했다"며 '수도권 전철이 개통되기까지'라는 제하의 해설을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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