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교통신문40=<11>1974년 현대차 포니 해외전시회 첫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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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교통신문40=<11>1974년 현대차 포니 해외전시회 첫선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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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73년들어 국산차 생산 강력 추진

준비중이던 현대, 즉각 개발 착수
'포니' 국제박람회 첫 출품해 호평
고속버스업계 광주고속 1위로 부상


1974년도는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이 두각을 나타낸 해이기도 하다.
9월 10일 정부의 주요공산품 해외전시회에 유성기업, 대원강업, 오리엔트휠타공업, 동양워너 등 34개 업체가 동남아B지역의 방콕·쿠알라룸푸르·자카르타·마닐라 등지에 KOTRA협찬을 얻어 자동차부품을 출품·전시, 관심을 모았는가 하면 10월 30일에는 제 55회 국제자동차박람회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개막됐는데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현대자동차가 국산차 '포니'와 '포니쿠페'를 출품해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주문이 쇄도했다.
그러나 '포니'는 시작차에 불과해 75년말에는 대량생산이 가능했으므로 수주를 따기는 힘들었다. 어쨌든 현대가 자주적으로 설계한 자동차가 국제적으로 각광을 받았다는 것은 한국자동차산업의 전망이 밝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 무렵에는 고속버스업계가 점차 대단위 추세로 바뀌고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동시에 서독으로부터 '벤츠'고속버스 40대를 도입, 운행하던 한남고속(사장 박윤주)을 호남의 대표적 업자인 광주고속(사장 박정구)에서 인수함으로써 고속버스업계의 톱으로 올라섰다.
광주고속은 당시 경부·호남·남해고속도로에서 120대를 운행하고 있었으며 한남고속을 인수한 후로는 보유대수가 160대를 돌파했던 것이다.
또 동양고속은 속리산고속 30대를 인수함으로써 140대가 되어 고속버스업계의 랭킹이 광주고속이 145대로 1위, 동양이 140대로 2위, 한진이 127대로 3위, 코리아그레이하운드가 85대로 4위, 천일여객이 80대로 5위, 유신상운이 74대로 6위, 중앙고속이 59대로 7위, 동부고속이 50대로 8위, 한일고속이 40대로 9위, 삼화고속이 40대로 10위에 랭크됐다.
본래 한남고속은 KTC(한국화물)을 인수해 상당히 건실한 회사로 인정받아 왔었는데 경영주인 박윤주 사장이 건강상 이유로 정리를 하게 되어 대지·건물을 모두 포함해 13억 원이 넘는 큰 흥정이어서 손쉽게 팔리지 못 할 것이라고 업계에선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고속은 박인천 회장 그룹이 인수키로 영단을 내리자 업계일각에선 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하기도 했다.
건설부는 12월 1일을 기해 고속도로 통행료를 화물 자동차 50%, 정기노선버스 20%로 각각 인상했다.
74년 12월에는 물가가 유난히 급등했다.
쌀값이 하루에 5백원∼1천원씩 올랐고 정부미가 가마당 19000원을 호가했다. 따라서 달러환율도 20%가 인상돼 1달러 400원에서 480원으로 조정됐다.
74년 12월 말 전국의 자동차등록대수는 승용차가 7만6462대, 합승이 4 77대, 버스가 1만9583대, 화물차가 7만6833대, 특수차가 4150대, 2륜차가 6039대로 총 18만3544대였다.
이를 지방별로 보면 서울에 모두 8만248대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승용차 4만4768대, 합승 239대, 버스 6076대, 화물차 2만6854대, 특수차 706대, 2륜차 1605대였다.
다음 부산에는 2만1581대가 있었으며 그 중 승용차 8188대, 합승 52대, 버스 1867대, 화물차 9492대, 특수차 1417대, 2륜차 565대였다.
경기도에는 승용차 4489대, 합승 59대, 버스 2926대, 화물차 8450대, 특수차 1411대, 2륜차 617대로 총 1만8003대가 있었다.
당시의 자동차등록현황을 분석해 보면, 승용차는 거의 서울에 집중돼 있었고 지방의 경우는 화물차가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중교통수단은 버스가 주종을 이뤘으며 지방에서 합승이 보기 힘들었다. 따라서 자동차대중화시대란 꿈도 꾸기 힘들었던 것이다.
당시 GNP는 6조 9429억 원으로 실제 성장률은 8.2%였으나 아직도 외국원조에 매달려야만 했다.
정부가 1973년 6월 30일 자동차공업 장기육성계획을 마련하고 한국 고유형 소형차의 양산화를 추진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한국공장들은 거의가 외제차종의 KD부품조립만을 생산하고 있었다. 이 같은 KD부품조립은 빈번한 모델변경으로 양산체제가 불가능했으며 소량생산으로 값이 무척 비싼데다 품질불량마저 면치 못하였고 설사 이런 상황에서 100% 국산화가 가능하다하더라도 수출시장 개척이 곤란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한국 실정에 적합한 한국형 승용차의 양산체제를 확립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고유형 소형차의 개발을 정책화했던 것이다.
정부는 국내자동차회사들이 기존 시설 외에 보디·엔진·미션 등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증설해야만 연간 5만∼7만대의 양산이 가능하다고 보고 업계로 하여금 증자토록 유도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문제는 어려움이 많았다. 후진국에서 자동차공업을 완전국산화해 자립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면 필연적으로 국제독점자본의 이해관계에 저촉되기가 쉬웠으며, 결국은 다국적기업과의 갈등이 우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비장한 결의로 국내자동차조립업자와 관련된 여러 여건 및 정치·경제적 요인들을 제거하면서 한국형 고유자동차 생산계획을 반국책사업으로 강력히 밀고 나갔다. 한마디로 이것은 주체적인 국익우선의 과감한 시책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정부는 국무총리명의로 "차종 또는 모델의 변경이 반복되지 않는 자동차의 완전국산화정책을 수립·시행하라"는 강력한 지시를 관계부처에 내리고, 상공부는 각 업체로부터 사업계획서를 제출받아 생산업체를 결정키로 했다.
물론 이 같은 내용의 공문은 즉각 신진·기아·아세아·현대 등 자동차메이커 4개사에 보내졌다.
정부가 73년 7월 20일자로 한국형 승용차 생산을 종용한 공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장기간 모델변경이 없는 경제적 차량으로서 원칙적으로 외국에서 생산 시판된 일이 없는 새로운 설계의 차형과 규격은 엔진기통 용적 1500㏄ 이하, 국산화율 95% 이상, 규모는 연산 5만대 이상, 생산가격은 2000달러 내외로 할 것" 등 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자동차공업육성 7개 기본원칙을 정했다. 완성차 생산 공장 육성을 위해 기존공장을 중점적으로 확장키로 하고, 신규설계 및 외자합작을 불허키로 했다.
또 차체·엔진 및 변속기 등 생산시설 구비의 의무화와 중추부품의 생산능력 확충으로 국산차 수출기반을 구축키로 했던 것이다.
현대자동차는 정부의 한국형승용차 양산화시책에 부응, 73년 8월 '한국형 자동차 생산을 위한 종합공장건설의 사업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현대는 이미 이 해 6월에 산업계획서를 만들어 가지고 있었으며, 현대의 발전계획안과 정부의 시책방향이 일치했기 때문에 이 자체안을 약간 추가·보완해 최단 시일 내에 사업계획서를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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