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교통신문40=<12>1974년 자동차 빅4 경쟁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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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교통신문40=<12>1974년 자동차 빅4 경쟁 불꽃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04.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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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놀라게 한 '포니'의 등장

첫 출품 토리노박람회서 이목 집중
한국 자동차입국의 사실상 시발점
포드에 있던 상표명 현대가 사들여


현대자동차 조립공장이 자리잡고 있는 울산시는 입지조건이 매우 좋았다.
당시 현대조립공장은 양정동 700번지에 이미 17만여 평을 확보하고 있었고, 인근에 약 50만 평의 대지를 계열사인 현대건설이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울산지역은 공업단지로 개발되고 있었으며 특히 울산만을 끼고 있어 1975년 이후 세계를 향한 수출 및 수입 원료 입하에 필요한 대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항만 시설이 가능해 추후 연간 30만대 생산규모를 위한 엔진 및 주·단조공장, 보디 스탬핑 및 단계별 생산규모에 부합되는 조립공장의 증설 등을 감안할 때 종합 대단위 자동차공장 설립지로써 적합했던 것이다.
정부의 '한국형 승용차 양산화 시책'에는 신진·기아·아시아 3사도 사업계획서를 내고 참여했다. 이로써 자동차 4사가 본격적인 생산준비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현대 외의 3사는 생산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장애에 부딪쳐 계획을 중단하거나 수정했으며, 오직 현대만이 유일하게 정부가 제시한 지침에 맞는 고유모델 승용차개발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포니'였다.
현대는 1974년 10월 30일 개막된 제55회 토리노 국제자동차박람회에 고유모델로 개발한 포니 승용차와 스포츠카형 포니쿠페 2종의 신제품을 출품, 기염을 토했다. 각국의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포니의 외양은 직선과 곡선의 절묘한 조화를 이뤄 시각적으로는 시대적 감각에 맞는 직선형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곡면을 이룸으로써 내부공간을 최대한 넓혀주며, 또한 차체가 전체적으로 유선형을 이루고 있으므로 주행저항을 최소로 감소시킬 수 있다"고 칭찬했다.
또 이들은 포니가 장착한 새턴엔진에 대해서도 그 성능의 우수성과 연료 소모율이 낮은 이상적인 경제성을 인정했다.
박람회 기간 동안 유럽 3대 일간지의 하나인 이탈리아의 '라 스탐파'지는 포니승용차의 사진과 함께 '한국이 자동차공업국 대열에 끼어들었다'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하는 등 유럽의 유수한 신문, 잡지들이 앞 다퉈 '포니'를 특집 보도했다. 이들 기사들은 한결 같이 포니가 이번 박람회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끌었으며 포니는 특히 선 흐름이 수려한 차라고 평했다.
현대의 포니가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세계최대규모의 박람회에서 처음 참가한 회사의 제품이 이같이 큰 관심의 표적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포니의 토리노박람회의 성과는 한국이 국력을 과시하는데 효과가 컸으며, 한국이 세계 16번째의 자동차 생산국으로 기록됐다는 사실 외에도 포니가 세계시장에 적합한 차종으로 관심을 끌게 됨으로써 해외수출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는 점에서도 큰 뜻이 있었다.
실제로 10월 29일부터 11월 10일까지 13일간 박람회가 열리는 동안, 현대는 영국·네덜란드·그리스·프랑스·잠비아 등 14개국의 수입상들로부터 포니의 수출대행에 대한 상담에 접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포니가 1차적인 성공을 거둠으로써 현대에 기여한 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현대직원들에게는 자심감과 의욕을 불어 넣었으며 크나큰 활력의 원동력이 됐다. 그 때까지도 이 프로젝트에 회의적인 사람들도 동참의 계기가 됐으며 전 사원은 종합자동차건설에 합심협력 했다.
포니라는 이름은 현대가 1973년 6월 시작차 제1호가 완성됐을 때 7월 18일부터 8월15일까지 39일 동안 차명을 공모, 전국에서 무려 5만 8천여통이 응모했다. 응모 엽서 중에는 아리랑, 유신, 무궁화, 새마을 등이 비교적 많았는데 현대는 이를 5차에 걸쳐 심사를 거듭한 끝에 현대적인 감각이 살린 모델에 맞게 포니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포니라는 이름이 당시 이미 한국특허청에 포드사의 상표로 등록돼 있었고 해외각국에도 포드의 상표로 등록된 곳이 많았다.
그래서 현대는 할 수 없이 포드사와 절충, 아예 포니상표를 사들임으로써 국내외에 현대 상표로 등록을 마쳤던 것이다. 그러나 포니의 절찬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종합자동차공장건설에는 애로가 뒤따랐다.
현대는 종합자동차공장 건설 벽두부터 뜻하지 않은 장애에 부딪쳤다. 디젤엔진공장건설 추진에 제동이 걸렸던 것이다.
현대자동차 20년사에 따르면, 그동안 서독 재정차관과 서독 MAN회사와의 기술제휴로 디젤엔진공장 건설을 추진해 왔던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가 정부에 대해 현대에 인가를 내주지 말도록 강력히 청원했던 것이다.
한국기계는 당초 서독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기로 했을 때 정부가 유일한 디젤엔진메이커의 지위를 약속했고 서독 엔진사업을 보장한바 있을뿐만 아니라 또 협소한 한국시장에서 디젤엔진공장이 이원화되면 기업성이 없어지므로 경제적 타당성 측면에서도 한국에 있어서는 상당기간 오직 1개 공장만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한국기계디젤공장 이외의 어떠한 공장도 인가를 해주지 말 것을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현대의 디젤공장 추진은 종합자동차공장 건설 계획 중 핵심부문 중의 하나였으므로 이것의 지연은 전체 공장건설을 위한 차관도입 성사여부에도 민감하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어서 현대로서는 최대의 위기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현대의 디젤공장건설사업은 한국기계가 1971년 12월 21일 연산 2만 4천여대 규모로 사업승인을 받기 1년 전인 1970년 12월 28일에 이미 포드와의 합작투자로 연산 3만 2400대 규모로 인가를 받은바 있었다.
이후 포드와의 합작투자계획이 80년대를 향한 정부정책과 상치되자 합작의 재검토 끝에 현대 단독사업으로 결정, 기술도입선을 변경했던 것으로 1970년 이래 현대의 계속사업이나 다를 바 없었다.
따라서 현대의 3만 2400대 계획은 한국기계의 2만 4000대 계획과 더불어 이미 그 당시의 타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으며 정부가 추후에 인가한 한국기계를 위해 현대디젤공장을 최소하겠다는 확약공한을 서독정부에 전달했으리라고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현대의 종합자동차건설에 소요되는 총 외자 5200만 달러의 73%가 넘는 3800만 달러를 영국 버클레이은행에서 차관키로 돼 있었는데, 이 차관도입은 영국 퍼킨스사의 디젤엔진제조기술 도입계약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현대의 인가가 취소되면 영국정부는 종합자동차공장 건설사업의 전체적인 타당성을 다시 검토하게 될 것이 분명했으며 최소한 공장건설이 6개월 이상 지연될 수도 있었다.
현대는 이 같은 사실을 정부측에 납득시키고 빠른 시일 내 결정을 촉구했다.
현대는 디젤엔진공장 건설계획에 관한 정부의 결정이 차관인가를 받은채 5개월이 경과하도록 미결상태에 놓이게 되자 전체계획에 많은 차질을 빚었다.
우선 1975년 말로 잡은 자동차생산 개시일을 지킬 수 밖에 없는 형편에 놓였고, 영국차관의 조기발효를 전제로 맺은 영국 공급자측과의 시설기계 구매조건이 차관발효의 지연으로 수정 내지 취소될 처지였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정부도 비로소 디젤엔진공장 건설추진여부가 종합자동차공장의 열쇠가 된다는 점을 인식, 마침내 1974년 9월 5일 현대의 공장건설사업계획을 추진토록 결정했다.
다만 정부는 "현대자동차 자신의 용도 및 범세계적인 포드회사계열에 합류함으로써 해외시장으로의 수출용으로만 제한된 것으로 이해했던 때문"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현대가 디젤엔진공장 건설을 추진하되 자가 수요를 제외하고는 전량 수출할 것, 1977년부터 생산을 개시할 것 등 2개 조건을 붙였다. 이는 서독 재정차관으로 사업을 벌이는 한국기계와의 경합관계를 방지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정부는 앞으로 디젤엔진생산은 한국기계와 현대에 한하고 신진·기아·아시아 등 기타 회사에게는 불허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현대는 정부로부터 차관도입 인가를 받은 1974년 3월 2일을 기점으로 종합자동차공장건설을 위한 제반계획을 실행에 옮겨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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