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년&교통신문40=<13>1975년 현대차공장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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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년&교통신문40=<13>1975년 현대차공장 준공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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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8cc 포니 76년 2월 29일 첫 출고

한국 자동차산업 역사적 첫걸음
75년 12월엔 현대울산 공장 준공
저연비·고강도 국산차 첫 탄생

현대의 자동차공장 시설재 도입은 1차적으로 1974년 5월 28일 프랑스 차관자금에 의한 구매계약을 E·W 블리스라는 회사와 맺고 프레스 및 롤링머신 공급계약도 맺었다.
계약액은 장비 5765만 프랑, 설치비 864만 7500 프랑 등 모두 6629만 7500프랑이며, 장비는 75년 6월말부터 6차에 걸쳐 분할 선적해 그 해 연말까지 기계장치의 선적을 마치기로 했다.
또한 영국지역에 대한 기계발주도 120여개 업체를 선정, 구매조건협상을 본격화했다.
엔진생산기계의 경우는 일본 미쓰비시 경도제작소에서 생산에 필요한 기계를 결정하고 영국업체에 발주했다. 이 기계는 1974년 10월부터 1975년 6월까지 59차에 걸쳐 도입됐으며 이 후 차관도입을 늘림으로써 300만 파운드어치의 시설재를 추가 도입했다.
일본에서는 처음 미쓰비시로부터 주·단주공장 건설을 위한 시설재만 도입키로 했으나 1975년 7월 차관액을 늘리면서부터는 금형발주도 대부분 오기하라 철공소 등 일본업체에 의존했다.
현대종합자동차공장의 기계 등 시설재는 이렇듯 유럽에서 많이 들여왔으나 실제 제품을 만드는데 수반되는 노하우라든지 금형, 조립용 용접기, 치공구는 일본에서 많이 공급됐다. 도장설비와 의장라인의 설비들은 외국에서 중요부품만 사오고 나머지는 도면만 사다가 국내에서 만들어 사용했다.
장비 발주와 구매협상에 나선 엔지니어들은 그 후 대부분 생산기술실로 배치돼 기계의 도입과 설치 및 기술요원들의 해외연수까지를 책임지고 수행했다.
이들은 신규공장의 기계장비에 대해 전혀 생소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1974년 초부터 기술제휴선에 가서 한두 달 가량 연수를 받으며 기계장비에 대한 종류, 사용법 및 측정방법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메이커에 대한 자료 등을 수집한 후 기계발주작업에 들어가 1974년 가을까지 대부분의 발주를 마쳤다.
한편 현대는 한국최초의 종합자동차공장 건설에 따른 공장의 배치 설계와 공장설계 등을 미쓰비시에 맡겼다. 당시 국내에는 종합자동차공장 설계경험이나 설계에 필요한 생산품, 공정, 기계설비, 재료 등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기술용역업체가 전무한 상태였다.
공장설계를 위해서는 제품의 성질, 공정의 순서, 기계설비의 성능 및 필요 공간, 각 직장의 시설, 재료의 성질, 운반, 작업환경조건, 배수, 배전 등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갖춰야 하는데 현대의 종합자동차공장이 양산체제의 공장건설로서는 국내최초의 것이었기 때문에 경험 있는 기술용역업자가 있을 수 없는 처지였다.
현대종합자동차공장은 1년 3개월의 역사 끝에 1975년 12월 1일 드디어 준공됐다. 이 공장의 준공은 이제까지 외제부품 조립생산에서 고유모델의 한국형 국민차를 국산화율 90%로, 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5만 6000대의 양산체제로 생산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한국자동차공업의 큰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신규공장은 단위공장으로서 프레스공장·차체조립공장·페인트공장·의장공장·주조공장·단조공장·엔진공장 등을 세웠으며 시험연구시설로서 기술센터를 갖췄다.
부지는 590만 2774평에 건평이 3만 7714평에 달했으며 이로써 현대공장은 기존 공장 건평 1만 7354평을 합쳐 모두 5만 5068평에 이르렀다.
현대는 이 종합자동차공장을 짓는데 외자 7081만 1000달러, 내자 2613만 5000달러 등 모두 9694만 6000달러를 투입했으며, 외자는 영국·일본·프랑스·오스트리아 등지의 은행이나 기업으로부터 차관했다.
신규공장의 완성으로 현대의 생산능력은 최소한의 국제경제규모를 갖추게 됐다. 공장별 생산능력은 조립공장 8만대, 스탬핑공장 8만대, 엔진공장은 가솔린엔진 5만 6000대와 디젤엔진 2만 4000대 등 8만대, 금형공장 700t, 주물공장 2만t, 단조공장 4천 800t이었다.
현대는 1975년 1월 설계도면과 푸로트타입(원형)을 인수하면서 포니생산을 위한 준비를 본격화했다. 기술파트는 양산을 위한 생산설계작업에 착수했으며, 이 설계에 따라 영국인 기술자와 합동으로 시제품을 제작, 주행 및 내구성 테스트를 1년 내내 계속했다.
각 공장의 기능공들은 가장 기초적인 기계가공기술에 대한 지식조차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가 태반인데다 기술설비의 대부분이 한국에는 처음 소개되는 것들이어서 거의 모든 기능공들이 재교육을 통해 기계원리와 기술을 습득해야 했다.
현대의 기사와 기능공들은 1년여 동안 기계 설치에서 시운전·시험절삭·시제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익히고 밤늦게까지 세미나를 열며 또 해외에 파견되는 사람들은 외국어공부도 해야 하는 등 거의 쉴 틈이 없었다.
1975년 12월 시작품 포니 50대를 생산, 마무리 테스트를 가졌다. 현대에 와있던 외국인들은 12월 19일 일단 전원 귀국한 후 1976년 1월 말에 다시 내한, 2월부터 포니의 본격 생산에 들어갔다.
1974년 12월 말에 1385명이었던 현대의 공장인원은 포니생산을 준비하던 1975년 1년 동안 배로 늘어 1975년 말에는 2740명에 달했으며 포니가 출고되기 직전인 1976년 2월 20일에는 다시 2976명으로 늘어났다.
포니는 1976년 1월부터 본격생산에 돌입했으며 1월 26일부터 판매계약을 받고, 2월 29일에 출고가 개시됐다.
포니의 판매가격은 당초 상공부에 의해 228만 9200원으로 책정됐다.
그러나 경제기획원은 포니의 가격이 높다는 여론에 따라 이 판매가격을 재검토, 출고를 불과 10여일 앞두고 사업용의 경우 대당 24만 1900원을 인하한 204만 7300원, 자가용은 1만 5930원을 내린 227만 3270원으로 판매가를 구분, 조정했다.
현대는 물가당국의 이 같은 판매가격 인하조치를 기아가 튼튼히 다져놓은 브리사의 영업용시장에 침투하기 위한 가격경쟁의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현대는 첫 해 매월 1천 500대씩 생산해 연간 1만 8000대를 생산한다는 계획하에 공장을 가동했으며 1975년 연말까지 62개국의 228개 수입사가 포니의 수입을 희망해 왔지만 1976년은 생산 첫 해였기 때문에 중동과 남미의 자동차 비생산국 몇 곳을 골라 중점 수출키로 했다.
포니의 엔진은 4기통 1238㏄, 80마력의 미쓰비시 새턴엔진으로 1973년 석유파동 후 연료난에 대처하게 위해 새로 설계돼 경제성과 강인한 내구성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구동력에 여유가 있었고 고속주행에서도 무리가 없었으며 등판능력도 좋았다.
또 시속 100㎞를 내는데 27초라는 놀라운 가속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신호등이 많은 번잡한 시내주행에도 적합한 승용차였다.
연료소모량은 시내주행시 당 13㎞, 고속도로 주행시 당 20㎞로써 배기량에 비해 연료소모량이 적었다. 특히 고속주행시는 여유 구동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포니 특유의 유선형 스타일은 주행저항을 감소시켜줘 연료소모량이 더욱 절감됐다.
포니 새턴엔진은 연료탱크의 통풍로를 통해 증발돼 나가는 연료가 약 2.4m의 긴 PVC관을 통해 배출되는 동안에 최대한 응축돼 다시 연료탱크로 떨어져 회수되도록 설계됐고, 일본의 배기가스 오염방지책인 MCA방식을 채용해 기관 개량방식에 의해 유해가스발생을 억제했으며 12가지의 각종 정화장치를 부착, 배기가스 정화능력도 탁월했다.
포니의 차체는 0.8㎜의 철판을 사용, 대단히 견고했고 국내의 도로사정에 가장 적합하도록 강인한 모노코크 보디로 돼 험로주행에도 무리가 없었다.
엔진실 및 리어데크는 충동사고 때 그 부분만이 접어져 충격이 승객실에 전달되기 전에 흡수되도록 설계됨으로써 인명 피해를 최대한 막을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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