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교통신문40=<14>자동차 대중화 '국민소득 1000달러 시대' 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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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교통신문40=<14>자동차 대중화 '국민소득 1000달러 시대' 견인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05.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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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 기폭제로 자동차산업 활황

아시아는 76년 끝내 기아에 팔려
현대, 포니 이후 새차 잇따라 내놔
포니수출 78년 첫 1만대 돌파 기염


정부의 경제적인 한국형 소형차 생산방침에 호응, 1973년 8월 자동차 4개사가 일제히 사업계획서를 제출함으로써 소형차 개발경쟁의 막이 올랐지만 현대 이외의 3개사는 정부와 약속한 대로의 사업계획을 추진하지 못했다.
기아의 경우는 일본의 동양공업과, 그리고 GM코리아는 독일의 오펠사의 차형을 각각 기본모델로 해 소형차를 생산할 계획이었으며 아시아는 모델조차도 확정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 3개사는 사업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1만∼2만대 수준으로 생산규모를 책정했다가 정부가 난색을 표명하고 수정을 권고하자 마지못해 연산 5만대 규모로 양산계획을 고치는 등 난맥상을 보였다. 말하자면 정부방침에 무척 회의적이었다. 더구나 석유위기 등 어려움이 닥치자 이들 사업계획은 변질되거나 중단됐다.
특히 정부는 아시아자동차의 투자규모를 보고 완전 국산화 및 양산화가 불가능하다고 평가, 아시아를 자동차생산업체 대열에서 탈락시켜 메이커는 3원화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정부는 아시아자동차회사를 다른 메이커에 점진적으로 흡수시키기로 하고 정리될 때까지 트럭과 버스만을 생산토록 허용했다.
아시아는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각 메이커에게 똑같이 5000여만 달러씩 투자하라는 것은 수요전망으로 보아 불합리하므로 점차 시설을 확대해 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으며 1년 후에 다시 승용차생산계획서를 제출하겠다고 했으나 정부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아시아자동차는 3년 동안 끊임없는 매도설에 시달리다 1976년 8월 165억원의 가격으로 기아산업에 흡수되고 말았다.
기아는 1973년 10월 3년간에 걸쳐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에 건설해 온 종합공장을 완공, 이 공장에서 1000㏄와 2000㏄의 가솔린엔진을 생산, 75년 말까지 국산화율 95%의 소형차 생산이 별반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973년 11월 석유위기가 발생하고 1974년 7월 한국형 소형차 양산화계획을 추진하던 정부의 담당자가 바뀌는 바람에 생산계획에 차질을 초래했다.
GM코리아는 1972년 6월부터 내자 35억원, 외자 30억원 등 모두 65억 원을 들여 엔진공장을 1974년 5월 완공했다. 그러나 GM본사로부터 파견된 관계자가 대규모 투자계획을 밝히면서도 실제로는 소형차생산을 위한 투자를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현대가 종합자동차공장을 건설하고, 고유모델 포니를 성공시킨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지만 찬스도 좋았다. 이 사업은 당시 '주은래 4원칙'에 따라 일본의 도요타가 한국에서 자진 철수함으로써 고유모델을 추진할 수 있었고, 때마침 포드와의 합작이 결렬돼 독자적인 자동차생산방침을 수립할 수 있었으며, 세계적인 석유위기 등으로 경쟁사가 투자를 주저함으로써 단독투자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국제정세의 변화, 정부의 올바른 정책방향, 현대의 투철한 의지 등 좋은 조건이 3위1체가 되는 찬스란 되풀이되기 어려운 행운이었다.
현대가 1976년 2월 말 한국형 소형차 포니를 첫 선을 보인 직후, 이 해 4월에 GM코리아에서는 배기량 1492㏄의 '카미나'를 시장에 내놓았다.
또 기아도 이미 1975년부터 985㏄의 '브리사'를 생산 시판해 왔기 때문에 이로 인한 국내자동차시장은 치열한 판매경쟁 속에 소형일변도로 급속히 변모해 갔다.
'포니'는 시판 첫 해에 1만726대가 판매됨으로써 6916대를 판매한 '브리사'를 제치고 승용차판매시장에서 1위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포니' 1개 차종으로 전체승용차시장의 43.56%를 점유했다.
또 '포니'는 1977년에 1만9847대가 판매돼 단일차종으로 전체승용차판매량의 54.08%, 1978년에는 3만8411대가 판매돼 53.54%, 1979년에는 4만69 71대로 52.52%를 점유함으로써 내수시장을 확고히 다졌다.
또한 '포니'는 생산 첫 해부터 수출을 시작, 76년 1019대, 77년 7427대, 78년 1만8317대, 79년에는 1만9355대로 해마다 증가시켜 나갔다.
'포니'의 성공으로 현대는 후발메이커로서의 핸디캡을 말끔히 씻고, 한국자동차공업계의 선두주자로 부상했다.
한편 현대는 1977년 9월16일부터 26일까지 11일간 여의도기계공업진흥회 전시관에서 국내최초로 자동차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전시회는 창사 1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열렸는데 현대에서 생산하는 21개 차종과 70개 관련 부품업체의 부품을 망라해 전시함으로써 한국자동차공업의 현주소를 점검하고 향후의 발전방향을 제시했다.
현대는 이 전시회를 통해 해외딜러들에게 현대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23개국 24개 대리점에 초청장을 발송했으며, 아시아·중동·중남미·아프리카 등지의 19개국에서 부부동반으로 35명의 대리점 관계자들이 참가했으며 개막리셉션에는 각국외교사절, 정부관계인사, 그룹인사, 취재기자, 고객 등 700여 명이 참석, 큰 관심을 보였다.
현대는 자동차전시회에서 관람자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500명 중 70%가 앞으로 4년 내에 한국에도 마이카시대가 도래 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답했으며 전시회를 관람한 결과 국산자동차의 수출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게 됐다고 응답한 관람객도 75%에 달했다.
또 80%는 "국력을 상징하는 중공업발전의 진면목을 보는 것 같아 감명 깊었다"는 소감까지 피력했다.
이와 같은 관람객들의 여론은 '자동차수요가 급격히 상승한다는 국민소등 1000달러 시대'를 바로 눈앞에 둔 시점에서의 일이어서 큰 주목을 끌었다.
현대는 '포니'의 판매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경기가 활성화되면서 수요층의 확대를 위해 승용차다양화에 착수했다. 우선 차종의 형식을 4도어 세단 외에 3도어 세단, 왜건, 픽업 등으로 다양화했으며, 1238㏄ 엔진 외에 1439㏄ 엔진도 새로 개발, 탑재했고 자동변속기를 도입하는 등 내·외장을 개선하거나 내장컬러도 여러 종류로 확대했다.
현대의 이 같은 승용차 다양화는 결국 수요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마이카시대의 진전을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
한편 현대는 1976년 12월에 중형차 '뉴코티나'에 이러 새 모델 '마크Ⅳ' 를 개발, 1977년 3월부터 판매했다. 이 차는 배기량 1593㏄ ML 영국포드 제품으로 중형승용차로서의 중후함과 고상함을 지닌 서구식 스타일, 안락한 승차감, 고도의 안전성 등으로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판매량을 자랑했던 차였다.
또 1978년 6월에는 독일 포드와 기술제휴로 대형고급승용차인 '그라나다V6'를 개발, 이 해 11월부터 시판에 들어갔다. 유럽 정통스타일의 이 차는 배기량 1993㏄, 최대출력 102마력의 고성능 6기통 엔진을 장착, 주행능력이 뛰어나고 고도의 안전도를 유지했다.
현대는 상용차부문에 있어서도 버스·트럭·특장차 등의 차종을 대폭 다양화했는데 이는 경제성장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따라 대폭 늘어나고 있는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현대는 상용차의 사양화를 통해 명실상부한 종합자동차공장체제를 확립했으며 이들 상용차마저도 판매에서 계속 활황을 맞음으로써 고유모델 '포니'로 첫 걸음마를 시작한 승용차부문의 안정적인 성장을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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