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교통신문40=<15>1979년 제2차 오일쇼크 '강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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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교통신문40=<15>1979년 제2차 오일쇼크 '강타'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05.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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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석유파동으로 전 산업 몸살

휘발유가격 1년새 192% 올라
자동차에 중과세…위기감 고조
10·26, 5·18 발발 정국 혼미


현대의 포니차 성공이 한국자동차공업에 활력소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79년에 들어서면서 제2차 석유파동은 자동차업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국제유가의 앙등으로 국내유가가 다락같이 오르고, 이것이 자동차수요를 격감시켰다.
1979년 7월10일 정부는 석유류값을 59%나 인상했고 이듬해인 1980년 1월29일에는 또 다시 59.43%를 인상했다. 그 후 8월, 11월에도 계속 인상하는 등 국내유가는 상승곡선만을 그렸던 것이다.
보통휘발유 가격을 기준으로 볼 때 1978년 말 당 198원 50전에 불과하던 것이 1980년 1월말에는 580원이 되는 등 불과 1년여 만에 192%나 올랐다.
정부는 내구성 소비재로서 석유소비가 많은 자동차와 관련해 여러 가지 직간접적인 수요억제조치를 잇달아 취했다.
정부는 1979년 초에 고급승용차 사용을 불허했으며 또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에너지절약방안의 일환으로 3월1일에는 자가용차의 휴일주유를 금지시키고, 4월1일에는 부도심권의 화물차의 통행을 금지시켜 종래 3.5t 이상의 통행을 제한했던 것을 2.5t 미만으로 낮춰 통행제한을 더욱 확대시켜 나갔다.
뿐만 아니라 4월16일에는 종전에 없던 차량등록세를 신설, 자가용승용차에 대해서는 5%의 세금을 새로 내도록 했다. 또한 자동차세도 50% 인상하고 차량저당권 설정 때는 3%의 세금을 신설, 부과시켰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0년 1월1일부터는 특별소비세에 대한 방위세율을 20%에서 30%로 인상하고 17일에는 대도시교통수단인 시내버스, 택시 등을 제외한 고속버스·시외버스·화물차·용달차 등 사업용자동차의 신규등록까지 불허했으며 1979년 말 수준으로 동결시켜 버렸다.
더구나 국세청은 탈세혐의자를 가려낸다는 명분으로 자가용자동차를 사치성 물품으로 간주하고 자가용소지자를 중점대상으로 세무조사에 착수, 판매의 대종을 이뤘던 자가용수요에 찬물을 끼얹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사상최대의 호황을 구가하던 자동차업계는 이러한 정부의 수요억제정책까지 겹쳐 날이 갈수록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여기에다 판매에 직접적인 부진을 초래한 크나큰 원인은 국내정치불안에 있었다.
뜻하지 않은 '10.26사태'로 인한 충격과 더불어 이후 연속적으로 일어난 사북사태, 광주항쟁 등은 경제활동 자체를 마비시켰으며, 급기야 80년에는 5.7%의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괴롭고 어두운 쓴맛을 봄으로써 기업마저도 갈등과 고통 가운데 헤메야만 했다.
제2차 석유파동은 1978년 말 이란혁명에서 비롯돼 세계경제에 커다란 충격파를 던져 주었다. 중동산유국의 석유무기화로 인한 유가의 급작스런 앙등은 우리나라와 같이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비산유국개발도상국들의 경제적 타격은 실로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 공업화추진과 함께 석유사용량이 급격히 증가해 1978년의 경우 전체 에너지에 대한 석유의존도는 무려 63.5%로 세계 평균치인 45%를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한편 급격한 유가인상은 원유를 해외로부터 전량 수입함으로써 막대한 외화부담을 초래, 국제수지악화의 주된 요인으로 등장했다.
또한 2차 석유위기는 우리나라 원유도입 형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78년말의 이란혁명 발발 전까지만 해도 필요한 원유는 합작회사인 메이저의 공급에 전적으로 의존해 왔었다.
그러나 1979년 초부터는 메이저의 공급이 삭감됨에 따라 정부는 산유국들과의 직접 거래를 해야만 했다. 정부간 거래가 1980년 총 도입량의 29.2%에 이르게 됐다. 물론 민간회사가 산유국의 석유회사로부터 도입하는 직접거래 원유도 16.4%에 이르렀다.
80년도 국내의 원유도입량을 보면 총 1억8300만배럴로, 사우디에서 61%, 이란에서 8%, 쿠웨이트에서 27% 등 전체의 96%가 이들 3개국에서 도입됐으며 중동지역 편중도는 자그마치 99%에 이르렀다.
그래서 정부는 원유도입선의 다변화를 위해 나이지리아, 아랍에미리트, 베네수엘라, 멕시코, 인도네시아 등 많은 나라와 원유도입교섭을 적극 추진했다.
또한 정부는 장기적인 에너지 수급구조의 전환계획을 수립하고 석유의존도를 줄여 나가기로 했다. 발전·시멘트산업을 비롯한 에너지 다소비업종의 연료를 유연탄으로 전화하는 한편, 원자력발전소의 지속적 추진, 액화천연가스의 도입, 태양열·풍력·바이오에너지 등 개발에 범국가적 노력을 경주키로 했다.
1979년 10월26일 정변으로 인해 중화학공업 주창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급서하자 한국의 중화학공업도 홍역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변 이후 새로 등장한 정부는 국보위상임위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전면적인 개편을 추진했다. 오랜 진통 끝에 1980년 8월 자동차, 발전설비, 건설용 중장비의 투자조정을 단행했다. 이른바 '8.20조치'였다.
1980년 8월19일 오전 10시 옛 숙명여고 자리에 있는 삼청장학회라는 간판이 달린 회의실에서 국내 굴지의 재벌총수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 자리에는 국보위 금려호 상공자원분과위원장을 비롯, 10여명이 동석했다. 약1시간에 걸친 회의 끝에 이날의 주인들인 정주영 현대회장, 김우중 대우사장, 정인영 현대양행사장, 박준 산업은행 부총재 등이 활짝 웃으며 나왔다.
1년 동안 진통을 겪었던 중화학공업 제1차작업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고 동시에 중화학공업분야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는 찰나였다. 24시간이 지난 20일 오전, 정부종합청사 4청 왼편 코너에 있는 상공부장관실 바로 옆에 달린 회의실에서 금 위원장은 '8.20중화학투자조종'내용을 발표했다.
금 위원장은 이 날 중공업분야의 산업합리화와 투자효율성 및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산업정책의 일환이라는 점을 밝히고 1차로 자동차분야 통합을 위한 4가지 투자조정방안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그 내용을 보면, 우선 승용차생산의 일원화로 현대자동차가 새한자동차를 인수하고 1개 법인으로 통합해 현대가 승용차를 독점생산토록 하는 한편 1.5t 트럭생산은 금지하고, 기아산업에게는 승용차생산을 불허하는 대신 1t 이상 5t 이하 트럭생산을 전문화해 독점생산하며, 5t 이상의 트럭과 버스는 자유경쟁원칙에 따르기로 하고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현대양행의 군포공장을 포함한 창원종합기계공장과 대우의 옥포종합기계공단을 1개 법인으로 통합, 대우그룹이 책임지고 경영키로 했으며, 새로이 합병된 법인은 현대와 대우그룹이 각각 책임지고 경영함으로써 중복투자와 기술의 분산을 막아 건실한 국제기업으로 유도키로 했다.
또 투자효율이 적은 사업은 과감하게 연기하거나 취소시키고 중전기기, 디젤엔진, 전자교환기 시스템을 기업끼리의 합병이나 기업간 협력을 통해 분야별 전문화가 이뤄지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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