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교통신문40=<17>1971년 자동차 4륜시대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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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교통신문40=<17>1971년 자동차 4륜시대 개막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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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에 들어서면서 기아산업도 전문생산업체 지정에 따른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차량의 종류를 다양화하여 봉고코치, 봉고밴, 봉고앰뷸런스 등을 생산하는 한편 농촌용 다목적차 쎄레스 등 제작에 주력했다.
특히 기아는 1981년 10월 민경중 회장, 김선홍 사장이 경영을 맡으면서 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새 경영진은 판매부진이 계속되는 한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봉고' 확판운동을 필사적으로 전개했다.
전종업원이 혼연일체가 돼 1980년에 생산을 개시한 봉고트럭(E-2200)과 1981년 생산을 시작한 봉고코치 12인승을 주력 차종으로 확판한 결과, 1981년에 보고트럭 1만3054대, 봉고코치 1011대를 판매했으며 82년에는 봉고트럭 1만3841대, 봉고코치 1만978대를 판매함으로써 2년동안 계속 됐던 적자경영에서 비로소 39억3000만원이라는 당기순이익을 올리는 흑자경영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기아는 이후부터 놀라운 신장세를 타기 시작했다. 1983년에는 봉고코치 9인승, 밴, 앰뷸런스 등의 판매활동이 더욱 활발해져 화물차종 4만2307대, 봉고코치 1만8947대 등 모두 6만1383대를 판매, 총 매출액 4019억 5136만원에 당기 순이익 291억199만8000원을 올렸다.
또 1984년에는 화물차 5만3886대, 봉고코치 1만991대 등 모두 7만3787대를 판매해 총 판매액 4566억 9934만5000원에 당기순이익 233억 9371만 5000원을 기록했고, 85년에는 화물차종 6만2044대, 봉고코치 2만 2048대 등 모두 8만4094대의 판매실적을 올려 총 판매액이 5000억원을 돌파했고 당기순이익은 175억 원에 이르렀다.
이로써 기아는 5년 동안 단일차종인 E-2200봉고트럭 11만 4152대, 봉고코치차종 7만5064대 등 총 18만 9216대를 판매하는 놀라운 업적을 기록, 우리나라 자동차업계뿐만 아니라 경제계전반에서 소위 '봉고 신화'를 창출했다.
본래 기아는 1971년부터 4륜화물트럭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첫 해에는'E2000' 330대, 'E3800' 193대 판매에 지나지 않았으나 1972년에는 'E2000' 1512대, 'E3800' 1134대의 판매실적을 올려 약 5배의 신장률로 껑충 뛰어올랐던 것이다.
1972년 당시 트럭의 메이커별 판매대수를 보면 기아 5159대, 대우 5005대, 현대 4061대, 아시아 2177대로 기아가 단연 1위를 차지했다.
기아산업(주)은 1944년 8월 해방 1년 전에 창업됐다. 경성부 중구 남대문통5 정목 57번지 2층건물에 가칭 '경성정공주식회사'라는 간판을 건 것이 그 전신이다. 사주는 학산 김철호씨. 그는 18세 때 맨주먹으로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에서 철공소 직공과 지배인을 거쳐 삼화제작소와 삼화정공을 직영하였고 39세 때 백만장자가 되어 조국에 돌아왔다.
김철호 사장은 기업인이기 전에 기술인이었으며 그의 경영자세는 영리추구에 앞서 기술인의 꿈을 실현코자 했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자수성가할 때까지 나라의 고마움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경성정공을 창업하면서 "이 땅에서 가난을 추방하고 자주국가를 세우는 길은 오직 기계공업을 발달시켜 나라의 공업화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는 그만큼 기계공업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국에서 기계공업을 일으키는 것만이 조국을 부강하게 만드는 왕도라고 믿었다. 김철호 사장의 기계공업과 산업보국에의 집념은 1953년 1월 그가 '회사의 목표'라는 3개항의 강령을 친필로 적어 공장과 사무실에 내걸은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① 조국 부강을 기하자 ② 기공(機工) 발전을 기하자 ③ 기업 번영을 기하자로 돼 있다. 말하자면 경영의 목표가 조국부강, 기공발전에 있다는 뜻이었다. 김철호 사장이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남김 유지에도 그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기아 45년사에 보면 "내가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오늘의 기아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생각해보면 모두가 조국의 덕이다. 내가 좀 더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은 한스럽다. 온 겨레가 잘 살아 보려는 새마을운동에 적극 참여토록 하여라"라고 남겼다고 한다.
김철호 사장은 끊임없이 미래에 도전했다. 기아는 처음에 3천리호 자전거생산으로 시작했다. 1952년 월 판매량 200대, 53년 300대 정도였다. 이것이 1958년에는 3000대로 늘어났고 1965년 1만 6712대, 1976년 5만5474대로 5만대선을 돌파했으며 이어 1976년에는 40만대, 1977년에는 55만대에 육박했다.
김철호 사장의 장인정신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자동차생산으로 확산되었다. 70년대 초반 한국자동차업계는 외제차의 조립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외국엔진을 탑재한 자동차를 어찌 국산차라고 할 수 있겠는가, 기아야말로 순수한국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시했던 것이다.
경성정공이 기아산업으로 바뀐 것은 `952년 2월 15일이었으며 6·25전쟁 때 부산 임시본사 임시주주총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정됐던 것이다. 그리고 상호의 변경과 함께 '자동차의 생산'을 추가했다.
당시만 해도 기아는 자동차에 도전할 여력이 없었다. 주변에선 충격적인 선언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김철호 사장은 "자전차가 생산되면 즉시 자동차 제작에 착수하고 자동차가 완성되면 비행기를 만들 것"이라고 말해 모두들 반신반의했다.
사실 기아는 1950년대 후반기 4년 동안 연속적자를 기록해 1959년까지 누적적자가 무려 4억 1633만 원에 이르렀다. 그러나 개척기에 있어서의 기아는 부산공장에 이어 시흥공장을 건설, 1960년대 자동차 공업에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다.
이 시흥공장의 건설은 1950년대 실적 중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기아는 시흥공장의 건설로 1950년대 후반기의 시련과 60년대 초기의 위기를 겪지만 이 시흥공장으로 인해 1960년대의 자동차 공업에 도전, 대약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의 기아는 가장 큰 위기에 처했던 시기였다. 김철호 사장은 "내가 기업을 시작한 이래 오늘과 같이 어려웠던 고비는 없었다. 그래서 비상대책을 마련했으니 서로 믿고 단합해 난국을 극복해주기 바란다"고 중역들에게 감량 경영을 지시하고 "자전차는 수익성이 낮으니 생산을 중단하고 대신 3륜 자동차와 2륜 오토바이 사업에 총력을 집중하자"고 비장한 각오를 피력했다.
그러나 이같은 감량경영 고육책은 별로 성과가 없었으며 1960년 11월에는 어음을 더 이상 막지 못하고 부도를 내고 말았다. 그래서 기아는 산업은행의 관리업체로 넘어가고 김 사장은 자택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며칠 동안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김 사장은 과장급 이상 모든 간부들에게 일일이 친필로 편지를 썼다.
회사가 은행 관리업체로 넘어가게 된 점을 사과하고 전 직원들이 단합해 난국을 극복하고 기아를 재건하자는 내용이었다.
임원들과 간부들은 연일 회의를 거듭하며 구사대책을 논의하는 한편, 김철호 사장은 1961년 5월 일본에서 3륜차 및 오토바이 제조시설을 도입, 시흥공장에 설치하고 생산을 서둘렀다.
때마침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고 기간산업의 확충과 공업 기술진흥에 힘입어 기아는 드디어 1961년 10월 오토바이 'C-1000'을 생산하게 되고 1962년 1월에는 3륜 자동차 'K-360'을 출하하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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