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교통신문40=<19>기아 구사·재건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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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교통신문40=<19>기아 구사·재건운동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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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고' , 위기의 기아호 구해내

2달에 1대 팔기 등 전직원 동참
눈물겨운 회사 살리기운동 주효
80년대 자동차업계의 새 강자로


기아산업(주)는 소하리공장 준공과 더불어 기업을 공개했다.
1973년 5월31일 7억 5000만원의 무상증자에 이어 6월15일에는 액면가격 500원의 유상신주 100만 주를 상장, 자본금 총액이 23억5000만원으로 늘어났다.
기아의 기업공개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기업공개를 꺼려하던 당시, 건실한 기업경영의 본보기로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런데 기아는 기업공개를 단행하면서 공모주식의 10%에 해당하는 10만 주를 종업원들에게 우선 배정, 종업원 특주제를 실시했다.
또 이해 7월4일에는 국내 최초로 2000㏄ 가솔린엔진을 생산했다. 이것은 1963년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지 8년만의 일이었고 소하리공장을 준공한지 한 달 만에 거둔 성과였다. 이 2000㏄ 엔진은 첫 해에 627대를 생산하고 일본에 50대를 처녀수출해 수입에만 의존했던 엔진을 처음으로 해외에 수출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를 발판으로 기아는 1973년 12월 1000㏄ 가솔린엔진을 생산하고, 1976년 10월에는 1300㏄ 가솔린엔진을, 1978년 11월에는 디젤엔진을 개발했던 것이다. 그리고 가솔린엔진 개발에 성공하자 곧이어 자동차부품업체인 (주)동우정기를 인수했다.
기아의 4륜자동차는 1971년 9월 시흥공장에서 'E-2000'과 'E-3800'이 제작되면서 막을 올렸지만, 일관공장시스템에 의한 본격적인 자동차공업은 1973년 8월 소하리 공장에서 소형 반트럭 'B-1000'(브리사픽업)과 중형 2.5t트럭 'E-2700'(디젤타이탄), 대형 4.5t트럭 'E-4100'(복사) 등이 생산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이들 3개 차종의 생산으로 기아는 한국의 대표적인 자동차메이커로 부상하게 됐으며 기술적으로나 영업면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지게 됐다.
창업주인 김철호 사장의 생애에 있어서 1973년은 사실상 마지막 불꽃과도 같았다. 29년간 그가 창업한 기아산업(주)은 한국의 대표적인 자동차메이커로 도약의 나래를 펴고 있는데, 반대로 그의 생명은 종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김철호 사장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어 갔다. 1973년 11월20일 김사장은 가족들과 중역들을 성모병원 513호 입원실에 차례로 불렀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러나 내가 좀 더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한스럽다"고 말하고 다음날 오전 10시 자택으로 옮겨져 11월22일 향년 68세를 일기로 파란만장의 생애를 마감했다.
다시 80년대로 넘어가 보자. 1981년 2월26일 기아의 제 37기 정기주주총회가 도큐호텔에서 개최됐다. 300여 명의 주주들이 참석한 이날 주총에서 김명기 사장은 당기영업실적을 보고했는데 손실금이 무려 237억 원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엄청난 마이너스 성장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공부는 주총이 있은지 이틀 뒤에 '2.28조치'를 발표, 기아는 걷잡을 수 없는 위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기아는 당기손익금 237억 원의 적자를 안고 승용차 생산중단, 2륜차 사업 포기, 모기업에 합병이란 존망의 위기를 맞아 경영진을 젊고 패기있는 소장층으로 개편, 난국극복에 주력하고자 했다.
81년 당시 기아그룹의 계열회사는 모기업인 기아산업, 기아써비스, 삼천리자공, 동우정기, 한국금형공업, 한국스핀들, 대서산업, 창원공업, 동영산업, 남영금속공업, 한일전장공업, 남일전지, 기아상사, 한국캬브레타공업 등 18개사에 이르렀는데, 1981년도 상반기 중에 한국스핀들, 남일전지, 기아기연공업, 기아상사, 한국캬브레타공업 등이 기아의 품에서 떠나야만 했다. 이들 기업 중 특히 기아기연공업의 매각을 심각한 타격을 줬다.
기아기연공업(주)의 매각협상은 '지정된 상대에게 팔지 않으면 안 되는 협상'이어서 기아는 처음부터 굴욕적인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아는 대림산업과 장장 98일동안 무려 50여 회의 절충을 거듭했다.
기아측은 순자산 119억원에다 영업권 200억원을 주장했으나 대림측은 80억원을 주장, 좀처럼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는데 6월4일 드디어 상공부장관실에서 95억원으로 결정, 주식매매계약을 위한 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실사과정에서 대림측이 다시 2억 원의 공제를 주장, 결국 인수가액 93억원으로 최종 낙착됐던 것이다.
이에 따라 기아는 기아기연공업 등 3개 사의 매매금액은 기아기연공업 85억3100만원, 기아상사 6억8200만원, 한국캬브레타공업 8700만원이었다. 이로써 기아기연공업은 기아그룹에서 떠나 타사의 것이 되었고, 기아의 2륜차 사업은 20년 만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대림의 기아기연공업 인수에 대해 당시 신문들은 기아의 피할 수 없는 처지를 동정어린 시각 속에 보도했으며, 대림의 일방적인 주장에 "기아의 3K가 크게 반발했다"고 적었다. 3K란 김명기고문, 김선홍사장, 김성웅전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기아산업은 1981년의 수난을 겪으면서 7월과 8월에 와이드로·타이탄 1.4t과 봉고코치 12인승(E-2200)을 생산 출하했다. 이들 두 차종은 1979년에 제작된 푸조-604와 피아트-132, 그리고 1980년에 생산된 봉고 1t(E-2200)과 수퍼타이탄 2.5t(E-3000)등과 더불어 고위기술흡수기의 말기단계 제품에 속하면서도 고위기술흡수기를 마무리 짓는 최종단계의 제품이었다.
봉고코치 12인승은 첫 해에 1013대를 생산, 단 2대만 남기고 1011대를 판매했고, 봉고확판 운동이 전개되면서 1982년에 1만 1003대, 83년 1만 3083대를 공급하는 등 1987년까지 5만 3353대를 판매·수출, 소위 '봉고의 신화'를 창출했던 것이다. 봉고코치 12인승의 제원을 보면 총배기량 2209㏄, 전장 4485㎜, 폭 1620㎜, 높이 1995㎜, 중량 1430㎏, 승차정원 12명, 최고속도 110㎞/h였으며 첫 출하 당시의 가격은 648만 6000 원이었다.
또 와이드로·타이탄 1.4t은 첫 해에 3647대를 생산, 2457대를 판매했고 1982년에는 2417대로 약간 감소했으나 1983년에는 무려 3712대를 공급했다. 그래서 1987년까지 2만 6763대의 판매실적을 올렸다.
와이드로·타이탄 1.4t의 제원은 총배기량 2522㏄, 전장 4695㎜, 폭1690㎜, 높이 1980㎜, 중량 1850㎏, 승차인원 3명, 최대 적재량 1400㎏, 최고 속도 110㎞/h였으며 첫 출하 당시의 가격은 541만 7000원이었다.
이 같은 두 주력 차종의 덕택으로 침몰 직전까지 몰렸던 기아가 다시 부상하기까지는 확판 운동이 크게 주효했다.
김철호 사장이 작고한 후 최고 경영진에서부터 말단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제2창업정신으로 똘똘 뭉쳤던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불붙기 시작한 구사·재건 운동은 눈물겨웠다. 기아사에 나타난 것을 보면 기폭제는 전 종업원의 궐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전 기아인에 확산된 구사·재건 운동은 크게 나눠 기아·동아 합병추진에서의 주체성 확보, 국내 첫 RCD22작전, 봉고의 신화를 창조한 확판운동 등 세갈래로 나눌 수 있는데 이것을 동시에 추진했다.
특히 1982년 3월 17일 발생한 '두 달에 자동차 1대 팔기 운동'의 종업원 궐기는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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