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교통신문40=<35>지하철 다핵도시화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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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교통신문40=<35>지하철 다핵도시화 추진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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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역사적 지하철 개통
논란 끝에 전류 교·직류 혼용키로
구차춘 시장 2호선 전철 '틀' 수정
84년 5월 8780억 들여 19.2㎞ 완공


서울역에서 청량리까지 9.54㎞에 걸친 지하철 1호선의 기공식이 거행된 것은 1971년 4월 12일이었다.
내자 198억 5500만 원과 외자 1939만 달러가 소요되는 이 역사적인 대 건설을 당시 지하철본부는 '민족의 지혜와 기술을 종합하는 역사적 대사업'이라고 표현했다.
이 공사에는 현대·대림·극동·동아·삼부·평화건업·건설산업·남광·금광·초석 등 건설 회사들이 참여했는데 처음에는 모두가 공사 경험이 없어 참여하기를 꺼려 당국에서는 이들을 설득하기에 고심해야 했었다.
1호선 건설은 처음하는 역사였기 때문에 어려운 일과 애로 사항이 많았다. 우선 국보 1호인 '남대문'이 진동으로 무너질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문화재위원회가 공사 중지를 요청하면서 서울 시청∼종로 구간에서 동아일보사 건물을 직각으로 우회하는 공사로 이를 승낙 받는데도 1년이 걸렸으며 더구나 청계천 밑을 횡단하는데 어려움이 컸던 난공사의 연속이었다.
특히 종로통은 도로가 협소한데다가 길 양쪽에 3층 이상의 고층 건물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흙막이를 위한 특수 시공을 하는 등 그 어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철도청의 수도권 철도 전철화 공사와 서울시내 지하철간에 매우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다. 즉 철도청이 시공하는 철도전철화에서는 2만 5000V인데 대해 시내 지하철 구간은 1500V 직류였으니 직류와의 교류의 택일 문제가 야기됐던 것이다.
수도권 철도를 지하철에 맞춰 1500V로 할 경우 그 유지비가 문제였으며 지하철 구간을 철도와 같이 25000V 직류로 하자니 전화선에까지 전류가 흘러 들어와 이른바 통화 장애가 일어나게 됐다.
서로 "교류로 하라", "직류로 하라"는 응수가 되풀이되다가 결국 철도는 교류로, 지하철은 직류로 하기로 하고 전동차는 교·직류 양용을 채택했다.
1973년 말까지 공사를 완료한다는 당초의 예정은 이 같은 문제점으로 부득이 1974년 8월까지 지연되고 말았다.
그러나 지하철 1호 공사는 이러한 난공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건설 기술진에 대한 신뢰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 공사의 수행과정에서 얻은 체험과 자신감은 그 후 우리 건설업계 해외 진출에 기폭제가 됐다.
본래 서울시 지하철건설본부가 발족된 후 여기서 구상했던 지하철노선은 지금의 노선과는 좀 달랐다. 당시 고안했던 노선은 제1호선에서 제5호선까지의 5개 노선이 총 133.04㎞였고 이것은 일본에서 파견됐던 교통조사단의 조사에서도 타당한 것으로 결론이 나 있었다.
그 내용은 1호선=서울역∼종로∼청량리(9.1㎞) 2호선=강남 삼성동∼성수동 경마장∼왕십리∼을지로∼마포∼여의도∼금포(35.5㎞) 3호선=성북구 미아동∼혜화동∼퇴계로∼영천∼갈현동(21.5㎞) 4호선=강남경부고속도로 입구∼율곡로∼대림동∼사당동(34.5㎞) 5호선=천호동∼신설동∼종로∼신촌(32㎞)이었다.
이같은 5개 노선은 모두가 교외에서 일단 도심에 깊숙이 들어와 다시 방향이 다른 교외로 연결하도록 돼 있었으며 마지막 5호선은 1호선이 통하는 종로를 다시한번 통과하기 때문에 1호선 공사때 그에 대한 대비까지 해놓고 있었다. 그리고 1971년 12월에는 2·3·4호선의 도심반경 5㎞이내를 통과하는 37.8㎞에 대한 측량을 끝내고 이를 확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1974년 9월 구자춘씨가 서울시장으로 부임후 제2∼5호선의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구시장은 '다핵도시론'을 주창했다.
"서울은 모든 기능이 도심에 집중한 단핵도시이기 때문에 교통은 혼잡과 마비를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며 "영동·잠실을 하나의 핵으로 개발하고 영등포지역을 또하나의 핵으로 개발, 3개의 핵을 가진 도시, 즉 다핵도시화 해야 한다"는 시책을 펴나갔다.
현재의 지하철 2호선은 이 다핵이론에 의해 형성된 노선이었다. 즉 잠심·영동이라는 핵과 영등포지역이라는 핵, 그리고 기존의 핵(도심)을 연결하기 위한 순환선이 구상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순환선인 2호선의 구상은 단핵 도심기능을 다핵 도심기능으로 분산해 도시의 균형적인 발전을 도모하고 경유지는 기존시가지의 밀집지대를 관통하고 가급적 도로를 이용, 건설비를 절감하며 1회의 환승으로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배치한다 또 도시계획상의 도로와 일반철도 또는 지하철 상호간의 연계수송을 고려해 노선을 배치하고 통행계를 우측계로 하여 노면교통의 통행계와 통일시켜 교통이용상의 착각을 배제시키기로 했던 것이다.
서울시가 한국과학기술원에 의뢰해 만든 '지하철 순환선(강남∼강북)건설을 위한 기술 및 경제성 조사'라는 용역보고서가 1975년 5월에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지하철 2호선 건설에 관한 최초의 유인물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강북∼강남 순환노선은 이미 형성된 강남도심과 영등포의 연결 즉 전철 및 도로 통로도 접근이 상당히 좋은데도 불구하고 영등포 도심은 도심활동이 미약, 부진상태에 있다.
따라서 영등포 도심활동을 더욱 강화해 영등포도심과 인근간의 접근을 향상하고 동시에 영등포도심에 도심형 고용효과를 올리도록 하는 것이 전개돼야 할 것이다"라고 그 타당성을 지적하고 "개발예정의 초점이 되고있는 영동·잠실지역은 핵을 중심으로 하는 제반활동이 전개되는데 필요한 요소를 중점적으로 개발해 나가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즉, 관공서·은행·통신기관·의료시설·교육시설·상업시설이 들어서야 하고 동시에 이 중심기능과 인근 주거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체계가 형성돼야 한다"고 기술했다.
또 "이를 뒷받침하는 교통체계로 영등포핵과 영동∼잠실핵을 연결하는 교통망이 선행돼야 하고 여기에 전기한 두 핵과 기존도심을 연결함으로써 강북밀집인구를 80년대를 기해 강남·강북의 인구비례가 각각 50%가 되도록 하는 지하철 순환계획의 구상은 도시계획상 현 단핵도심을 3핵 도심으로 개발하는데 그 구체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계획된 2호선은 총공사비 8780억원이 투입돼 완전개통 목표일인 1983년 12월말보다 약 5개월이 지연된 1984년 5월 22일에 개통을 보았다.
이 순환선은 국유철도와 지하철 1·3·4호선과의 연계수송을 위한 환승시설이 조화있게 배치돼 서울지하철망의 근간을 구성함으로써 지하철주축 교통체계에의 전환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2호선 건설사업 구간별 개통날짜를 보면 1단계구간=14.3㎞(80. 10. 31) 2단계구간=5.5㎞(82. 1. 23) 3단계구간=8㎞(83. 9.16) 4단계구간=6.7㎞(83. 12. 17) 전 구간 계통=19.2㎞(84. 5. 22)이다.
이 공사는 1호선의 체험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건설했기 때문에 지하철건설 기술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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