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교통신문40=<36>고속철도시대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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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교통신문40=<36>고속철도시대 개막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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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교통체계를 바꾼 고속철도 건설


1963년 신칸센 시범운행이 계기
1989년 건설추진 방침 최종 확정
철도 도입 100년째 시험운행 성공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앞둔 1999년 12월 16일 오전 10시 30분, 20량이 한 편성을 이룬 거대한 열차가 충남 연기군 소정면에서 그 위용을 드러내며 눈부신 속도로 달렸다.
이날 이 열차는 우리나라 철도 사상 최고의 속도를 기록했다.
전장 388m KTX 2호 열차는 시험선 구간 34.4km 구간을 질주함으로써 경부고속철도 건설사업이 수많은 시련과 역경을 딛고 본궤도에 진입했음을 국내외에 천명한 것이었다.
한국고속철도 KTX는 출발지점인 상봉터널 입구를 떠난지 불과 2분만에 우리나라 육상교통수단으로는 최초로 시속 200km의 속도를 기록하며, 미끄러지듯 레일위를 질주했다.
이날 이 역사적인 감동의 순간을 지켜보는 공단 임직원과 시공사, 감리단 등 건설에 참여했던 모든 관계자들은 시험운행이 있기까지 하루도 편한 날이 없던 지난날의 시련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고, 관계자들은 다시 한번 경부고속철도 건설사업을 성공적으로 완벽히 마무리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1992년 6월, 땅 한평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첫 삽을 뜬지 7년 반. 사업 추진과정에서 국민과 언론으로부터 우려 섞인 비판과 질타, 한때는 사업중단까지 논의되는 아픔을 겪는 등 그동안 길고도 험난했던 날들로 점철됐으나, 1999년 12월 시험운행을 성공적으로 개시함으로써 1899년 한반도에 신문명을 알리는 철도가 개설된지 100년만에 또다시 고속철도가 21세기를 주도하는 변혁의 주체로써 그 기치를 드높이 올리는 순간이었다.
경부고속철도는 서울∼부산간을 기존철도인 새마을호가 4시간30분이 걸리는데 비해 2004년 4월 우선 개통시에는 2시간40분, 2010년 완전개통후에는 1시간56분에 주파해 전국이 실질적인 전국 반나절 생활권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고속철도시대의 개막은 우리나라 국토는 물론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이며 프랑스, 독일, 일본, 스페인에 이어 세계 5번째의 고속철도 보유국이 됨으로써 국민의 가슴에 커다란 자긍심을 심어주며 새로운 도약을 약속하는 국가발전의 견인차가 될 것임을 기약했다.
경부고속철도는 이미 37년 전인 1963년, 개통을 1년 앞둔 일본 도쿄∼오사카간의 신칸센 시험운행에 동승했던 우리나라 철도기술자들의 가슴에 고속철도가 아로새겨지면서 비롯됐다.
당시 우리나라에 불어닥친 조국근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파견됐던 철도기술자들은 일본 신칸센 시험동승에 이어 1962년부터 1964년 10월까지 시속 240km의 고속열차에 대한 경탄을 억누르며 보고서를 만들었고 이 보고서는 최고통치권자에게 보고됐다.
그러나 고속도로 중심의 교통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시기여서 최고통치권자와 철도관계자들은 장래를 기약하며 검토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으나, 이미 그때부터 철도고속화에 대한 불씨가 당겨졌고 그 불씨는 경부선 철도의 신호체계 개선, 선형 개량 등의 노력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1973년 12월 철도차관 도입과 관련, 세계은행(IBRD)의 의뢰를 받은 프랑스 국철조사단과 일본 해외철도기술협력 조사단이 서울∼부산간 수송현황 타개를 위한 조사 실시 후 장기대책으로 경부축에 새로운 철도건설을 제의했다.
이어 1978년 11월부터 1981년 7월에 걸친 한국과학기술원의 '대량화물 수송체계 개선 및 교통투자 최적화방안' 연구결과에서도 철도망 우선구축 및 경부축에 새로운 철도건설을 제의함에 따라 정부에서도 고속전철의 필요성을 절감, 1981년 6월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1982년∼1986년)에 서울∼대전간 160km 구간에 대한 고속전철 건설계획이 반영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1983년 3월 제5차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 수정시 경부축의 새로운 교통투자는 경부고속전철 타당성 조사 후 결정키로 계획이 수정됐다.
같은 해 3월부터 1984년 11월에 걸쳐 미국 루이스버저(Louis Berger)사 등이 공동참여, 서울∼부산축의 장기교통투자 및 서울∼대전간 고속철도 타당성 조사가 시행됐다.
1985년 타당성 조사 결과 장기적으로 철도중심의 대안이 경제성이 높으며 타 교통수단보다 고속철도 건설이 유리한 것으로 나타나 1986년 9월 제6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1987년∼1991년)에 경부고속전철 기술조사계획을 반영했으며, 경부고속전철은 새로 취임하는 대통령 공약사항으로 제시되는 가운데 이듬해인 1989년 5월 경부고속전철 건설 추진방침이 결정됐다.
이후 두달 뒤인 1989년 7월 24일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고속전철 및 신공항 건설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가 발족됐다.
이와 함께 철도청 주관으로 경부고속전철 기술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주요 내용으로는 ▲교통수요 및 경제성 분석 ▲노선·역사 선정 대안 검토 및 기본설계 ▲차량형식 선정을 위한 입찰제의서(RFP) 작성 등이었다.
그 뒤 1989년 12월1일 철도청 내에 전담 작업반으로 5개 담당과에 총 54명으로 구성된 '고속전철기획실'이 설치됐다. 경부고속철도 건설은 고속전철기획실이 설치되고 이듬해인 1990년 6월 기본계획이 발표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총투자비 5조8462억원, 열차의 설계 최고속도는 시속 350km로 서울∼부산을 1시간 40분대에 주파하는 것으로 계획을 확정, 경부고속철도를 1991년 8월에 착공해 7년 후인 1998년 8월까지 완공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고속전철기획실이 설치된 이듬해인 1990년 6월15일 제3차 추진위에서는 기술조사에서 선정한 노선대안을 심의, 서울∼천안∼대전∼대구∼경주∼부산을 잇는 경주경유노선을 확정했다.
당초 밀양직결노선과 경주경유노선 등 상정된 2개 대안을 검토한 결과 경주경유노선은 다소 우회하나 국내최대 공업도시인 울산, 포항지역을 아우르고 경주 관광객들을 수용할 수 있어 교통수요가 많고 재무성이 양호한 것으로 분석됐다.
노선선정과 사업계획이 확정되자 정부는 1991년 3월 4일 고속전철기획실을 고속전철사업기획단(이하 기획단)으로 확대개편했다. 기획단은 1991년 3월 30일 최적노선에 대한 항공사진 측량실시 용역계획을 체결했고, 같은 해 6월 서울∼부산간을 14개 설계구간으로 나눠 노반에 대한 실시설계 용역업체로 14개팀 17개 업체를 선정했다.
1991년 8월26일에는 사업수행의 본격화와 함께 고속철도 차량형식 선정을 위한 제의서(RFP)를 일본, 프랑스, 독일에 발송했다.
기획단에서는 설계와 건설의 경험이 없는 고속철도건설을 우리 기술로 추진한다는데 대한 논란과 불신 등으로 계획수립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토목부문은 국내기술진에 의해 계획설계와 시공을 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표준시방서와 공사품질관리지도서 등을 작성하기 위해 대한토목학회와 한국강구조학회 등 총 113명의 국내 최고의 기술진을 투입했다.
또한 대전∼천안간 시험선 약 50km에 대한 착공시기를 이듬해인 1992년 6월로 방침을 정하고 해당구간에 대한 측량과 지질조사, 구조물 설계 등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환경영향평가를 위한 용역을 계약하고 평가 초안서 작성에 들어가는 등 착공을 위한 사전 준비작업을 착실히 추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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