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TI 브리프<6>] 한상진 한국교통연구원 교통안전연구그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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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I 브리프<6>] 한상진 한국교통연구원 교통안전연구그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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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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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운행기록계를 활용하자

운송 산업은 대표적인 레드오션이다. 버스, 택시, 화물 운송시장은 모두 수요에 비해 공급이 많아 경쟁이 치열하다. 시장에서 공급 과잉은 낮은 가격을 만들어낸다. 낮은 운임으로 사람과 화물을 실어 나르니 좋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가계에서는 버스나 택시 요금이 낮아 교통비 부담이 적고 기업 측면에서는 운송비 부담이 적어 제품의 생산원가를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체적으로 물가 안정화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낮은 운임은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는다. 무엇보다 운송 산업 종사자들의 근로 여건이 열악해 진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더 오랜 시간 일해야만 한다. 화물차의 하루 평균운전시간은 11시간이라고 한다. 그 만큼 피로한 상태에서 운전하는 경우가 많다. 아울러 도착시간이나 배송시간을 맞추기 위해 과속하기 쉽다. 시간이 돈이기 때문이다.

이런 피로 운전과 과속운전은 사고로 연결될 개연성이 높다. 실제로 버스와 화물차로 인한 교통사고 사망자수는 2015년 기준 996명으로 전체 사망자수의 21.6%나 차지한다. 버스와 화물차 등록대수가 전체 차량대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4% 수준이라는 측면에서 사고 위험이 얼마나 높은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낮은 운임은 교통사고 발생의 원인이 되고 이는 곧 사회적으로 큰 비용을 초래한 셈이다. 싼 운송요금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외국에서는 이런 위험운전을 막기 위해 사업용 차량 운전자의 운전시간에 제한을 둔다. 가령 유럽연합 기준을 예로 들면 연속으로 4시간을 운전하지 못하게 하거나 하루 최대 9시간 이상은 운전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다. 이런 규정을 어기면 벌금을 운전자뿐만 아니라 운전자가 속한 회사에도 부과한다. 운전시간 관리의 책임은 회사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운송산업에는 1인 자영업 형태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개인택시처럼 개인이 버스나 화물차를 소유하고 있지만 특정회사의 이름으로 일을 하거나 아예 독립적으로 일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특성 때문에 운송업은 근로기준법 적용의 예외대상으로 분류되어 있다. 최대운전시간이나 휴게시간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이런 규정부터 정비해 나가야 한다.

외국에서는 운전시간제한 준수여부를 단속하기 위해 운행기록계를 수시로 점검한다. 예를 들어, 도로변에서 경찰이 화물차를 세우고 운행기록계를 점검해 운전제한시간을 준수했는지 과속하지는 않았는지 점검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화물차 운전자가 규정시간이나 속도를 지키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도 2013년부터 대형차를 대상으로 운행기록계를 장착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교통안전법 제55조에 의해 운행기록계 내용을 근거로 회사나 운전자에게 어떤 불이익도 줄 수 없게 하고 있다. 좋은 장비는 있지만 활용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많은 비용을 들여 설치한 운영기록계를 이젠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대형차의 운행시간제한이나 휴식시간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운행기록계의 수시 점검과 규정 위반 시 회사와 운전자 양쪽의 처벌도 뒤따라야 한다.

대형차 운수업계에서는 운전시간제한은 물론이고 운행기록계 내용에 근거한 처벌을 반대한다. 가장 큰 이유는 지금처럼 낮은 임금수준에서 운행시간까지 줄면 일을 못하는 만큼 회사나 운전자 모두 수익이 줄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전시간제한을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운행시간제한이 줄어든 만큼 수입을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최소운임을 정부가 정하거나 보조금 지급 방안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운송업에 종사하는 차량대수는 늘어나지 않으면서 운행시간이 줄어든다면 전체적으로 공급이 줄어든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운송시장에서 운임이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경제와 안전은 많은 경우 상충하는 가치이다. 안전을 위해 무작정 돈을 많이 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형차 안전관리 수준은 우리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인지 다시 생각해야 한다. 얼마 전 4명이 사망하고 36명이 부상한 영동고속도로 봉평터널에서의 전세버스 사고도 졸음운전 때문에 발생했다. 이처럼 버스나 화물차 운전자의 졸음은 애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대형사고로 연결된다. 화물차 운전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도로 이용자의 문제라는 것이다. 대형차의 사고위험을 막기 위해 비용이 더 든다 하더라도 대형차의 운전시간제한과 운행기록계의 활용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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