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수원 나혜석 거리' 나혜석 죽어서야 고향 수원에 뿌리내린 예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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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수원 나혜석 거리' 나혜석 죽어서야 고향 수원에 뿌리내린 예술혼!
  • 노정명 기자 njm@gyotongn.com
  • 승인 2018.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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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는 가운데 수원 나혜석 거리가 재조명 되고 있다.

나혜석의 '수원'은 태생지인 동시에 노스탤지어의 공간이었다. 고향이었음에도 돌아갈 수 없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는 한 여자이기 전에 예술가로서의 삶에 충실했던 일에서 기인된다.

그의 이름 앞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 한국 최초의 전시회 개최 등이 그것이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만큼 그의 삶은 남성 중심의 한국 근현대사회에서 선두적인 모습으로 설명된다.

여기에 신여성으로서의 이혼, 천도교 대표 최린과의 스캔들 등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주홍글씨를 가진 한 여자로서 설명되기도 한다. 이혼녀라는 이름은 고향에서 그를 반기지 않는 이유였기도 했다.

그런 탓에 수원은 나혜석에게 있어 그리움의 공간으로 해석된다. 특히 그가 미술가와 문학가의 꿈을 키웠던 둥지였던 점에서 의미를 되새길 수 있을 듯하다.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군 신풍리(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에서 태어나 1948년 서울의 어느 행려병자 무료 병동에서 숨을 거뒀다고 알려졌다. 그가 오빠 경석의 집에서 자취를 감춘 시점인 1946~7년 이후의 일들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현대사회에서 ‘도시’는 이미지가 소비되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수원은 현재 어떤 이미지로 볼 수 있을까. 수원은 수원화성 등 전통문화와 IT 등 첨단산업이 공존하는 과거와 미래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가 태어난 수원은 수원 화성을 중심에 두고 오랜 역사를 가진 영동시장 등 큰 시장을 가진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로, 1년 365일 활력이 넘치는 도시라는 점을 손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나혜석이 태어난 해는 조선 22대 왕 정조가 수원 화성을 축성한 지 100년을 맞는 해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아볼 수도 있다. 수원은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2016년 기준 220년) 전의 신도시였으며, 문화적인 측면에서 기원의 공간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렇듯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나혜석과 수원과의 연결고리를 찾는다면 나혜석이 화가의 꿈을 키웠던 시원의 장소라는 측면에서 강조된다. 특히 그림을 그리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을 꿈꾸던 어린 나혜석은 서울 진명여고로, 다시 일본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서양화과)로 유학을 간 일에서 확장된다.

그가 수원 삼일여학교에 다니던 시절, 흰 종이에 스케치를 자주 하곤 했다고 한다. 소를 몰고 밭을 가는 농부의 모습 등을 스케치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오빠 경석이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묻자 “죽을 때까지 그리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 일화에서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수원의 장소를 시원의 장소로 삼을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나혜석의 흔적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반면 수원에는 그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곳들이 있었다. 바로 나혜석 거리, 나혜석 옛길, 나혜석 생가터 등이 그것이다.

수원에서 나혜석에 대한 공간이 탄생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원래 ‘나혜석 거리’로 논의된 장소는 현 ‘나혜석 옛길’(나혜석 생가터 길목) 부근이었으나, 장소 매입 등의 어려움으로 무산됐다.

 

현재 ‘나혜석 거리’가 위치한 곳은 오래전 홍난파 거리로 계획됐던 곳이었으나 홍난파의 친일 논란 등의 이유로 무산됐다. 1999년 4월 정월 나혜석 기념사업의 ‘나혜석 바로알기 심포지엄’이 개최되면서 나혜석 기념사업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1995년 4월 기념사업회를 발족한 ‘정월 나혜석 기념사업회’ 유동준 회장이 정부에 나혜석을 문화인물로 신청했고, 문화관광부가 2000년 2월의 문화인물로 나혜석을 선정하면서 ‘나혜석 거리’가 생겨나게 됐다.

나혜석 거리에 세워진 동상은 문화체육부의 지원금(5000만 원)으로 마련됐다. 먹자골목의 뒷문이던 곳은 바로 나혜석 동상이 세워지면서 거리의 얼굴인 동시에 입구의 역할로 자리를 잡게 됐다.

특히 이 거리는 인근에 경기도문화의전당, 효원공원, 수원시 야외음악당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이뤄져, ‘문화의 거리’인 동시에 문화가 재탄생하고 연결되는 공간으로도 풀이된다. 도시는 이미지를 소비한다. ‘나혜석 거리’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공간이며, 이미지를 생산하는 도심 속의 휴식처로 순환되기도 한다.

분수대와 정장 차림의 나혜석 동상을 따라가다 보면, 거리의 양쪽에는 전문식당들이 탄띠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혜석 거리는 날씨가 화창한 봄부터 가을까지 많은 이들의 휴식처로 사랑을 받고 있었다. 특히 문화와 만남이 공존하는 의미의 공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혜석 기념비(표석)는 행궁동 주민센터 맞은편의 화성행궁 화령전 앞에 세워져 있으며, 행궁동 주민센터 부근의 나혜석 옛길을 지나면 ‘나혜석 생가 터 표석’을 만나볼 수 있다.

현재 그가 다녔던 삼일여학교 터(수원 화성의 장안문과 영화동 사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생가터도 원 지점(수원 화성의 화서문에서 20m 지점)에서 떨어진 곳에 표석이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예술가’란 모름지기 자기 자신을 활활 불태워 창작의 산고를 겪으며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창작된 작품은 또다른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 의해 재생산될 수 있는 게 예술의 기능으로 볼 수 있다. 수원에선 나혜석의 예술세계를 기념하는 등의 각종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그의 이름이 붙여진 미술제 등 문화행사들이 수원 곳곳에서 진행되는 점이 그런 의미로 보인다.

이렇듯, 나혜석은 수원의 후배 예술가들에 의해 호명되고 있었다. 누군가에 의해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바로 예술의 효용성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나혜석이 새롭게 재탄생이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월 나혜석 기념사업회 유동준 회장은 “나혜석은 우리나라 서양화 초기의 대표작가이며 우리 서양화의 개척자이고, 전업작가 제1호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며 “특히 농업도시 수원에서 농경시대의 농촌, 농가 등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화홍문, 화령전 작약 등의 작품이 수원 배경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월 나혜석 연보

군수를 지낸 개명관료였던 아버지의 2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남.

- 1913년 진명여고보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일본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진학.

- 1914년 세이토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신여성운동이 활발했던 도쿄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여권론 <<이상적 부인>> 발표.

- 1915년 아버지가 결혼을 강요하면서 학비를 보내주지 않자 휴학, 1년간 보통학교 교사로 돈을 모아 다음 해 복학.

- 1916년 첫 사랑의 애인이었던 시인 소월 최승구 병사.

- 1918년 단편소설 <경희> 발표. 사립여자미술학교 졸업.

- 1919년 3.1운동에 여학생의 조직적 참가를 논의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5개월간 옥고.

- 1920년 변호사 자격을 딴 김우영과 결혼.

- 1921년 만삭의 몸으로 개인전람회 개최. 일본 외무성 만주 안동현(현재의 단동시)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과 함께 안동으로 이주.

- 1923년 에세이 <<모(母)된 감상기(感想記)>> 발표.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이후 매회 출품 입상 또는 입선의 영광을 누림.

-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으로 특선.

- 1927년 구미여행길에 오름. 나혜석은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남편은 영국에서 법학 공부 했다. 파리에서 당시 천도교 도령인 최린을 만남.

- 1929년 미국을 거쳐 귀국. 수원에서 구미사생화 전람회 개최.

- 1930년 최린과의 관계가 문제가 돼 이혼함.

-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정원’이 입선, 같은 그림이 제12회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입선.

- 1933년 여자미술학사를 열었으나 실패, 그림이 불타는 불운을 겪으면서 건강 악화.

- 1934년 에세이 ‘이혼고백장’을 발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킴.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면서 최린을 상대로 정조 유린에 대해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내어 세간의 화제가 됨.

- 1935년 에세이 <신생활에 들면서> 발표. 서울에서 소품전을 개최했으나 외면당함.

- 1938년 마지막 글(에세이) <해인사의 풍광> 발표. 전해 말 일엽 스님을 찾아 간 수덕사 견성암과 수덕여관에서 1943년까지 그림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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