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량축소 요청제'로 택배기사-회사 갈등 재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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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량축소 요청제'로 택배기사-회사 갈등 재점화
  • 이재인 기자 koderi@gyotongn.com
  • 승인 2020.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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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발전방안'이 택배 시장 혼란의 단초로 작용
택배회사 “정부 권고사항 반영한 근로개선 결과물”
택배기사 “사용자 일방통행, ‘희생양 찾기’ 아니냐”

 

[교통신문 이재인 기자]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는 택배 시장의 노동문제가 또 다시 수면 위에 올랐다. 집배송 업무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건당 수수료를 정산받는 택배기사들과, 이들 개인사업자에게 일감을 위탁하는 원청 택배업체 간 시비 공방이 재발한 것이다. 발단은 위탁 배송원의 근로조건 및 환경개선을 골자로 한 택배기사들이 요구사항이 근 5년여간 지속된 바 있는데, 이에 대한 사후조치가 현장에 적용되면서다.

‘삶의 질 개선’ ‘과로사’ 등을 이유로 택배기사의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현장에 투입되는 위탁 배송원을 증원해 업무 하중을 분산하자는 제안이 수렴된 게 화근이 됐다.

▲딜레마 빠진 정부 대책, 시장경제 오판
이해관계자 간 우월적 지위 남용을 방지하고 ‘상생발전’과 ‘공정거래’를 확보한다는 명분 아래 ‘표준계약서’ 도입 대상에 ‘택배’가 적용됐다. 햇수로 3년 전 정부가 확정한 ‘택배서비스 발전방안’에는 택배기사의 초과근무 수당과 휴가 사용을 보장하는 표준계약서를 작성토록 하고, 오는 2022년까지 전면 적용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법적으로 개인사업자이나, 택배회사가 주문한 지시사항을 이행해야 한다는 사용자성이 받아들여지면서 정부 대책이 수립된 것이다.

이듬해 위탁 배송원의 과로사와 물류센터 배치인력의 사망사고가 터지면서 택배 노동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은 확대됐다. 무인 자동화기기 설비를 통해 육체노동과 업무시간을 단축하고, 근로 강도에 대한 부담을 완화하라는 정부의 권고가 택배업체에 내려진 것도 이 당시다.

이에 따라 원청 택배사들은 ‘첨단물류’, ‘스마트물류’ 등의 슬로건 아래 대대적인 업장 개보수를 진행함과 동시에, 최근에는 사상 최초로 ‘택배 없는 날(8.14)’을 확정하고 택배기사의 할당 물량 분산과 근로시간을 조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문제는, 정부의 지시사항이 택배기사의 활동력 저하와 수입 감소라는 악재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택배사로부터 일감을 내려받아 집배송 업무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수입원을 충당하는 계약조건으로 운영되는 점을 감안하면, 근로시간과 개개인에게 배당되는 배송물량이 줄어든 만큼 이와 비례해 택배기사의 실수입 줄게 되는데, 시장경제의 원칙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근로환경 개선사항 수용했을 뿐”
7월 28일 택배 시장 점유율 1위인 CJ대한통운은 ‘물량축소 요청제’를 명문화했다. 집배점과 택배기사간 관행처럼 돼 왔던 배송물량 협의 조정 사항을 표준계약서에 명시하는가 하면, 개인사업자인 점을 고려해 배송물량과 영업 활동량에 맞춰 위탁 배송원의 수입이 늘도록 하고, 택배기사가 원할 경우 근로시간의 축소 여부를 선택하도록 조정한다는 게 핵심이다.

이와 함께 8월부터는 택배기사의 건강관리체계에 대한 재점검 용역이 실시되는데, 연말까지 보다 택배 종사자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시스템 보완작업이 취해진다. 회사는 근로 여건 개선을 골자로 한 정부 대책과, 사용자성이 상당하다면서 ‘원청-하청’ 상생 협력하라는 관계부처의 권고사항을 반영한 점을 언급, 택배기사들이 자발적 선택을 통해 배송물량을 줄이는 대신 ‘저녁이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라며 ‘물량축소 요청제’의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택배기사가 집배점에 배송물량 축소를 요청하면, 해당 집배점은 인접 구역 등의 다양한 상황을 고려해 택배기사와 합의 절차를 진행하게 되며, 별다른 요청이 없을 시에는 택배 시장의 성장세에 맞춰 일감을 조달받게 된다. 다시 말해, 작업 시간 증가에 따른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수입을 증가시키고자 한다면, 현재 상황을 유지하면 되고, 반대로 수입이 일부분 줄더라도 업무량을 줄이고 싶을 경우에는 배송물량 축소 요청을 하면 되는 것이다.

CJ대한통운에 따르면, 지난해 택배기사들의 월 평균수입은 전년 대비 3.3% 증가한 597만원(연 7166만원)으로, 각종 지출비용(집배점 수수료, 운영비, 소득세, 유류비, 식대 등)을 제외한 순수입은 월 449만원(연 5387만원) 수준으로 집계됐다. 회사는 보다 작은 구역에서 보다 많은 물량을 배송하게 되면서 배송효율이 높아졌고 동시에 단위 구역당 수입도 증가하는 추세인 점을 언급, 주 52시간 이내에서 정해진 급여만 받고 일하는 일반적인 근로자와 달리 수입과 배송물량을 연동할 수 있는 개인사업자의 특성이 반영된 제도임을 강조했다.

회사 관계자는 “CJ대한통운 택배기사의 20% 가량이 가족과 함께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고용한 경우도 상당수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물량정점을 찍는 화요일과 최저인 월요일 사이클을 감안해 택배기사 개인이 화요일과 수요일에 아르바이트를 쓰는 등 다양한 형태로 서비스가 운영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용자 택배회사의 무책임에 통감”
위탁 배송원들의 노동조합인 전국택배연대노조는, CJ대한통운이 발표한 개선방안에 대해 강한 유감의 뜻을 밝혔다. 같은 날(7.28) 택배노조는 입장문을 통해 CJ대한통운의 ‘물량축소 요청제’는 택배회사 스스로 무책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어불성설에 지나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지금 역시도 물량 조정을 원하는 택배기사는 해당 소속 대리점에 뜻을 전달하고, 이 과정에서 의견이 수렴되지 않으면 종전 그대로 일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고 노조는 반박했다. 택배노조는 문자 그대로 ‘지금처럼 물량을 줄이려면 집배점과 지점의 허락을 받아서 진행하라’는 것이라면서 ‘물량축소 요청제’의 실효성을 꼬집었다.

코로나19 여파로 늘어난 물량을 감당하기 어려워 담당 배송기사가 이전 수준으로 물량을 줄인다면 적치된 증가분의 택배는 동료 기사의 몫으로 전가되는데, 이는 ‘희생양 찾기’에 불과하다는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현장 배송인력 증원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도 시행은 무의미 하다는 지적이다.

택배노조 관계자는 “구역별로 계약하는 택배 현장에서 구역조정이 아닌 물량축소는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되묻고 싶고, 구역과 물량은 연관은 있으나 엄연히 다른 개념이기에 결과적으로 강제적 구역조정의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농후하다”면서 “기존 배송기사들이 줄인 자투리 물량을 배달하려고 하는 기사들은 없거니와 일방적으로 익일 2회전 배송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신규인력 채용이 과연 가능한지 의문”이라며 반문했다.

한편, 표준계약서 도입에 대한 반응도 회의적이다. 과로사, 물류센터 화재 등 각종 사건 사고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표준계약서가 당장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택배노조는, ‘오전 분류하차’ 작업을 택배기사의 장시간 노동의 근원으로 지목했다.

7시부터 13~14시까지 무임금 분류하차 작업을 강요받고 있는데, 그로 인해 CJ대한통운이 주장하는 ‘저녁이 있는 삶’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택배노조에 따르면 택배기사의 하루 업무시간의 절반이상이 분류하차, 공짜노동에 투입되고 있고, 코로나19 관련 택배 물량 증가세와 비례해 노동시간 역시 늘었다.

노조는 무임금 노동의 금전적 보상 또는 별도의 분류하차 작업 인력 증원을 합리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택배기사의 수입과 직결되는 집배송 업무를 오전시간부터 가능토록 조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택배노조는 7월 28일 출범한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를 통해 근로여건 및 환경개선과 관련된 현실적이고 책임 있는 대책 마련을 택배사에 촉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재인 기자 koderi@gyotong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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