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1966년 그 때를 기억하십니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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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1966년 그 때를 기억하십니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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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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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신문이 고고의 함성을 울리던 1966년은 국가 사회적으로 체제의 틀을 막 갖춰가던 시절이었다.
국민소득이라고 해봐야 1인당 125달러 수준이었으니 현재의 2만 달러에 비하자면 그야말로 아득한 시절이었다.
당시 373억 달러로 기록돼 있는 1년간 국내총생산 규모는 41년이 지난 지금 760조원에 달한다. 환율의 현저한 차이를 감안해도 규모면에서는 약 30배 가량 성장한 셈이다.
1966년의 인구는 2915만명, 그러니까 현재의 4838만명의 약 60%에 육박하던 시절 우리나라에는 불과 4만9천여대의 자동차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지금이야 도로마다 거리마다 넘쳐나는게 자동차라고 하지만, 당시는 자동차야 말로 부의 상징이자 특급교통수단이었다.
지금이야 흔하디흔한 자가용 승용차는 특정계층의 인사들만의 전유물이었으니 도시 생활을 이루는 거의 모든 것이 관 주도로 이뤄졌다.
일반인이야 당연히 대중교통수단인 버스를 제1의 교통수단으로 이용했으며 대도시지역에 소수의 택시가 고급 승객을 실어 날랐다.
이 시기에는 수도 서울에는 거의 자취를 감췄지만 일부 도시에서는 비록 소수지만 여전히 인력거가 영업을 했다. 자가용 승용차를 운행할 여력이 안되는 중산층들이 짧은 구간 이동을 위해 이용했으나 그나마 택시 출현 이후 속도 면에서 경쟁상대가 되지 못해 사양화되고 만다.
역내 화물운송은 리어커나 지게도 있었지만 역시 주수송수단은 미 군정이 남긴 소형트럭과 우마차였다. 지역간 수송은 일제가 부설한 철도에의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철도는 장거리 여객운송과 화물운송 모두에 거의 절대적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만해도 고속도로가 없었고 고속버스 대신 시외버스가 운행됐지만 비교적 비싼 요금 때문에 철도승객이 월등히 많았다.
철도는 간선철도를 제외하고는 주로 산업수송용이었는데 도시지역을 잇는 구간에 따라서는 화차에 여객을 싣고 달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1966년은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안정을 구가하던 시절로 나라 전체가 개발의욕을 불태우던 시기였다.
각 산업은 장기발전 전략으로 외국기술과 자본을 들여오는데 바빴지만 유독 교통산업 활성화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강했다.
박 대통령의 고속도로 건설 구상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부강한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물자와 인력의 신속하고 안정적 운송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실한 시대적 요구를 제대로 인식했던 것이다.
대도시지역은 물밀듯이 몰려드는 인구로 하루가 다르게 덩치를 키워갔다. 특히 서울은 인력과 자본, 기술이 한데 모이는 국운 발전의 첨병이자 거점이었다. 이 시기 서울의 출근길은 통학생과 직장인들의 행렬로 인도가 비좁을 지경이었고 만원버스는 이미 이 시기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이호철의 장편소설 ‘서울은 만원이다’가 동아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것도 1966년 2월 8일부터였다.
1966년 새해는 전국자동차노동조합의 임금인상 투쟁으로 시작됐다.
당시만 해도 대체 수송수단이 없었던 시민들에게 버스요금인상은 상당한 충격으로 작용했다. 노동조합은 1월 10일까지 임금을 인상시켜주지 않으면 총파업에 나서겠다고 밝혀 정부와 시민 모두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와같은 일이 있기 열흘 전 정부는 우편·전화·전신요금 등 공공요금 인상을 단행했으나 버스요금만은 올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임금인상의 길이 막힌 버스노조가 강경투쟁에 나섰던 것이었다.
그 결과 정부가 손을 들었고 시내버스와 택시, 시외버스 요금 인상을 결정, 교통두절의 파국을 모면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1966년은 교통부문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이뤄진 한해였다.
우리나라에 도시교통난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나온 것도 이 무렵의 일로, 특히 그 해 3월 서울시장으로 취임한 김현옥씨는 서울의 교통문제를 8월 15일까지 31% 완화시키겠다고 공언했다.
김시장은 교통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대규모 지하도 건설을 추진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광화문·명동지하도다.
김시장은 이해 강북과 강남을 잇는 한남대교와 서소문고가도 건설했으며, 주간 교통소통을 위해 화물차의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다.
한남대교는 한강에 건설된 네번째 교량으로, 지금은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의 진입 관문 역할을 하지만, 당시는 강북의 산업인력을 강남으로 신속히 출근시키기 위해 입안됐다. 1966년 1월 19일 착공해 4년 만인 1969년 12월 25일. 6차선 교량으로 개통 당시에는 제3한강교로 부르다가 1985년 한강종합개발사업을 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됐다.
1966년 6월 25일 완성된 서울 중구의 서소문고가는 빠른 교통을 위해 한발 더 나간 것이다. 요즘은 고가도로라고 불리는 이 차도 육교의 개통식은 화려했다.
당시 서울시장이 5색 테이프를 끊었고 시민 중 최고령 부부를 초청해 차도를 위한 다리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걸어 봤다. 길이 493m를 기념하기 위해 동서 양쪽에서 493번째로 다리를 건넌 차량 운전자에게 각각 특별선물을 선사하기도 했다.
박종욱기자 pjw2cj@gyotong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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