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교통신문40=<21>1948년 민간항공사업 첫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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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교통신문40=<21>1948년 민간항공사업 첫발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0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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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A, 1954년 민항최초 국제선 취항

적자 못 견딘 KNA 1961년 파산
국영 대한항공공사 1962년 발족
全日空 통해 국제선 노하우 배워


한국 교통사에서 항공분야의 발전과 공헌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우리의 민간 항공이 오늘의 '세계적 날개'로 발전하기까지에는 숱한 각고의 드라마가 연출돼야만 했다.
우리 민족이 하늘의 비행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제 때 미국인 조종사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에 자극을 받고 부터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로 알려진 안창남이 그러했고 장덕창·서웅성 ·박기옥 등 비행선각자 모두가 아트 스미스의 영향을 받아 집념을 불태운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스미스의 곡예비행 2년 후에는 비행기도 많이 발전해 비행사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무척 많았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만이 비행사 자격을 얻어 모험가로서, 취미인으로서의 생활을 누렸을 뿐 생활을 위한 직업으로서의 인식은 그 당시만 해도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제 때는 일본군이 단지 군사적 목적을 위해 겨우 여의도 간이비행장을 이용했을 뿐 민간 항공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민간항공사업이 정식으로 발을 내디딘 것은 해방 후인 1948년의 일이다. 일제 때 '조선비행학교'를 세워 비행사를 양성하던 신용욱이 그 해 10월 '대한민국항공사'(KNA)를 설립, 미국에서 '스틴슨'이란 기종의 비행기 3대를 들여와 우선 서울∼부산 간을 취항시켰다.
'스틴슨'이란 기종은 2차 대전 때 미군이 정찰·관측용으로 사용했던 경비행기의 하나로, 190마력에 폭 10.4m의 2인승이었으나 앞뒤를 5인승으로 개조한 단발 비행기였다.
이 때만해도 항공여행이 생소해 1회 운항에 탑승할 정원 4명의 승객을 확보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신용욱씨는 49년 2월 1일 서울∼강릉, 서울∼광주∼제주, 서울∼옹진 간 노선을 증설, 취항시켰다.
민간항공의 뉴프런티어인 신용욱씨는 적자에 허덕이면서 끈덕지게 버티어 나갔으나 불운하게도 6·25를 당하고 말았다. 군부는 즉각 신용욱씨의 '스틴슨' 2대를 징발했고 1대는 신씨가 직접 조종, 부산으로 피난했으나 이것마저도 징발돼 신씨는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항공사업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다. 9·28 수복 후 전시 중인데도 그는 KNA 재건에 착수, 더글라스항공사가 제작한 'DC-3'형 2대를 임차로 도입, 취항시켰다.
그 후로도 54년 8월 'DC-4' 비행기를 새로 들여와 이번엔 서울∼대북∼홍콩의 동남아 노선에 취항시킴으로써 우리나라 민항사상 최초의 국제선 취항을 기록했다.
KNA의 사장 신용욱은 경영 수완도 능수능란했다. 그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비행기에 당시 내로라하며 정계를 주름잡던 인사들의 '아호'를 따 비행기에 이름을 붙이는 등 정치색 짙은 수완까지 발휘했었다.
즉 우남호(이승만 박사의 호), 창랑호(장택상 씨의 호), 만성호(이기붕씨의 호)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들 비행기 중에 '우남호'는 영광을 누렸고 '창랑호'는 비극으로 끝났던 것이다.
1955년 10월 당시 평화 신문사에서는 하와이 교포 1세들을 모국에 초청하는 행사를 가졌다. 이 때 신용욱은 신문사 사장인 홍찬씨를 찾아가 그 수송을 담당하겠다고 말하고 비행기 중에서 하와이와 인연이 깊었던 이승만 박사의 아호인 '우남호'를 취항시켰던 것이다.
이 '우남호'는 동경을 거쳐 호놀룰루로 날아가 46명의 교포를 태우고 여의도 비행장에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우리나라 민간 항공 사상 최초로 태평양 횡단비행 기록을 세웠다.
하와이 교포 1세들은 해방 후 10년 만에 내 나라 국적인, 더구나 이승만 박사의 아호를 딴 '우남호'를 타고 조국을 방문했으니 감격과 감회가 깊어 눈물을 흘리는 승객들도 허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창랑호'는 비운을 맞은 비행기였다. 1958년 2월 16일 오전 10시 국내 승객 28명과 승무원 3명을 태우고 부산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중 평택 상공에서 괴한에 납치돼 북으로 끌려감으로써 민항공 사상 최초의 피납 여행기라는 쓰라림을 겪어야 했다.
한 달 후 승객들 대부분은 돌아왔으나 기체는 압류되고 말았다.
KNA의 창업주 신용욱은 이 사건과 부채로 허덕였지만 성장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으며 59년 7월에는 서울∼시애틀 간의 부정기운항을 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계속 적자는 쌓여갔고 경영난에 허덕였다. 결국 신용욱는 견디다 못해 1961년 7월 16일 한강에 투신자살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당시 군사정부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KNA의 구제방법을 검토했으나 별 뾰족한 방법이 서지 않았고, 이 기회에 국영 기업체 설립을 위한 '대한항공공사법'을 제정키로 했던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항공사 KNA는 이 땅에서 소멸의 운명을 맞아야 했다.
이것은 KNA가 탄생한지 14년 만의 일이었으며 이때만 해도 사람들은 여객기를 타본 경험을 크게 자랑거리로 여겼다.
우리 항공사에 두 번 째 타자로 등장한 것이 국영기업체인 '대한항공공사'(KAL)였다.
물론 KNA시대부터 즉 60년 11월 29일부터 62년 2월까지 1년 3개월의 짧은 기간에 '한국항공'(Air Korea)이라는 항공회사가 있기는 있었다. 미 8군의 용역으로 많은 수익을 올린 당시의 조중훈이 운영했던 것으로, 이때만 해도 행운의 여신이 외면했던지 경영이 불실해 도산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항공사 기록에는 활자로만 남아있을 뿐 별로 뚜렷한 업적이 없었다.
1962년 6월 9일 발족한 대한항공공사는 초기부터 기업신장을 위해 노선개발과 기종 개량에 주력했다.
자체 항공기를 보유하지 못했던 대한항공공사는 어려운 경로를 거치며 일본항공사(전일공)의 'DC-3'1대와 'DC-4'1대를 우선 빌려 창립 5개월 만에 국내선에 투입했다.
이 때만 해도 한·일간 외교관계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였으므로 피차 교섭에 장애가 되는 부분이 많았다.
1962년 9월 말쯤 대한항공공사측은 일본에 급히 건너가 젠닛코(전일공) 등 항공관계자들과 비행기 도입에 대한 교섭을 벌였으나 일본 항공 측의 반응은 무척 냉담했다.
한·일간 국교 정상화가 안 된 상태에서는 정부 보증을 받을 수 없으니 속수무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항공측은 끈덕지게 설득전을 벌였다. 일본항공측은 물론이지만 일본정부의 운수성·대장성을 찾아다니며 교섭을 벌인 결과, 한국 은행으로 하여금 동경은행을 통해 '취소불능신용장'을 발행케 하는 편법으로 젠닛코측과 임차계약을 맺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KNA의 경영난으로 서울∼홍콩간의 동남아 노선 운항을 중단해 2년여 동안 '국제선 부재'라는 공백기를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4년 3월 대한항공의 교섭으로 서울∼오사카간 880㎞의 한·일간 노선이 지루한 협상 끝에 개설된 것이었다.
뒤이어 1965년 6월 22일 한·일간 국교정상화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비로소 정기항공노선도 정식으로 개설됐다. 동경올림픽을 10개월을 앞두고 국제선이 트였으니 승객들도 제법 모였다.
이것을 계기로 서울∼동경, 서울∼오사카, 서울∼후쿠오카 등 3개 노선을 KAL과 JAL이 공동운영하는 유대까지 맺게 된다.
이것은 국제선경험이 미숙했던 대한항공이 일본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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