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교통신문40=<18>기아자동차의 '기아마스타'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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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교통신문40=<18>기아자동차의 '기아마스타' 신화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0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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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속 '기적의 3륜차'로 눈물겨운 재생

국내 첫 가솔린엔진공장 설립도
김 사장, 소하리공장 준공 실현
'자동차 완전국산화의 터전' 평가


오토바이 생산 등 자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아의 재무구조는 호전되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기부터 누적된 적자와 4·19혁명, 5·16 군사 혁명 등으로 인해 야기된 경기위축은 기아의 경영을 적자의 늪에서 허덕이게 했다.
기아는 제1차 3륜차 사업이 부진하게 되자 경영방향을 과감하게 바꿔 다시 자전거에 역점을 두기로 했다.
기아는 오토바이나 3륜자동차 보다는 자전거에 익숙해 있었으므로 그만큼 생산이나 판매가 용이했다. 이 주력제품의 환원으로 인해 기아는 겨우 적자 경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경영이 안정 궤도에 진입하자 기아는 다시 경영방침을 바꾸어 오토바이와 3륜자동차에 역점을 두었다.
창립 20주년이 되는 1964년 기아의 당기 순이익금은 처음으로 2000만 원을 기록했다. 1964년 1월 정부는 수출드라이브정책의 일환으로 해외에서 원자재를 수입할 때는 수출액만큼의 수입량을 허용하는 이른바 '수입링크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기아는 3륜자동차·오토바이·자전거·파이프 등이 생산되고 있었지만 이들 제품이 아직은 수출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에 오토바이와 3륜차를 생산하는데는 부품의 수입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철호 사장은 단기적으로 자전거의 수출화를 추진하면서 장기적으로는 오토바이와 3륜차의 완전 국산화를 실현하는데 주력하고 사장직속의 자동차과를 신설, 자동차 국산화대책을 연구케 했다.
이에 따라 자동차과에서는 3륜차의 장·단기간 국산화 방안은 물론 4륜트럭의 생산 기반 조성방안 등을 주요 과제로 선정, 연구에 들어갔다.
이 때 김선홍 차장이 일본으로 건너가 혼다기연공업과 동양공업에서 1개월간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가솔린 엔진공장 건설 계획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정부 당국에 제출돼 1964년 7월 기아는 경제기획원으로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가솔린엔진공장 건설허가를 받았다. 이 가솔린 엔진 공장은 그 후 소하리공장의 준공과 더불어 1973년 7월 우리나라 최초로 자동차 엔진을 생산하는 '자동차 국산화'의 요람이 되기도 했다.
1966년 3월 김철호 사장은 경향신문사 회장에 잠시 취임했으나 1년 만에 다시 사장직에 복귀했으며, 제 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과 더불어 기아는 제 1단계 3륜차 사업을 보다 치밀하게 진행시키는 한편, 일본의 동양공업 차종을 분석, 중형 3륜차인 'T-2000'의 모델을 도입키로 했다.
1967년 1월 기아는 마침내 제 2단계 3륜차사업의 첫 제품으로 'T-2000'을 내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기적의 3륜차 기아마스타’였다.
'T-2000'은 발매개시 첫해에 1200대를 판매해 'K-360'과 'T-1500'의 전체 판매량을 단숨에 뛰어넘고, 다음해인 1968년에는 2602대, 1969년에는 4138대가 팔려나가 1973년까지 모두 1만 5952대라는 경이적인 실적을 기록했다.
'T-2000'의 제원은 표준형이 총배기량 1985㏄, 수냉식 4기통 VA엔진에 전장 5120㎜, 폭 1840㎜, 높이 1920㎜, 중량 1485㎏, 승차인원 3명, 최대적재량 2000㎏, 최고 속도 1백㎞/h였으며 생산기술은 CKD 조립기술을 도입(로열티는 국산화 가격의 2% 이내)하고 제품의 국산화율은 32%였다.
기아는 'T-2000'이 크게 히트하자 일본에서 기계 설비를 도입, 생산시설을 확충하는 한편, 동양공업과 다시 5t 이하 화물자동차 제조기술계약을 체결하고 1968년부터는 표준형 외에 여객·화물 겸용 6인승, 덤프트럭, 분뇨차, 밴 등을 잇달아 발표했으며, 따라서 기아마스타는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또 제2단계 3륜차 사업으로 'T-2000'과 더불어 1969년 8월부터는 'T-600'을 출하했는데 이것 역시 호평을 받아 첫 해에 155대, 1971년에는 2076대 등 1974년까지 모두 7726대를 판매하는 놀라운 실적을 올렸다. 'T-600'의 제원은 'K-360'과 비슷해 총배기량 577㏄, 공랭식 2기통 EA엔진에 전장 3295㎜, 폭 1320㎜, 높이 1450㎜, 중량 520㎏, 승차인원 2명, 최대적재량 500㎏, 최고속도 75㎞/h였다.
이들 두 차 차종은 결국 1단계 3륜차 사업에서 부진했던 실적을 완전히 만회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공급대수는 2만 3678대로 약 424억 원의 판매액을 기아에 안겨주었던 것이다.
1960년대 우리나라 3륜자동차의 대명사로, 1970년대에는 4륜트럭의 대명사로 대중의 뇌리에 새겨진 기아산업(주)의 상표 '기아마스타'(KIA MASTA)는 1962년 1월 'K-360'이 처음 출하될 때부터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T-2000'이 본격화됐던 1967년 하반기부터라고 볼 수 있다.
기아가 1961년 동양공업에서 3륜차 제조설비 및 SKD 조립기술을 도입할 때 동양공업 측에서 MAZDA라는 자사의 상표를 국산화제품에 반영해 주기를 희망했었다. 그래서 사내간부들을 사대로 새 상표를 공모한 결과 기아와 마츠다의 합성어인 '기아마스타'가 선정됐던 것이다.
기아산업으로서 1960년대를 위기라고 한다면 1970년대 초기의 여건은 호기라고 말할 수 있었다. 1960년대에는 회사가 산업은행 관리업체로 넘어가고 자동차공업시책에서도 3륜차가 제외돼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회사의 경영도 안정궤도에 들어서고 자동차공업 육성시책의 대상에도 포함되었다. 기아는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자전거 수출이 급증, 1970년도에는 200만달러를 달성, 정부로부터 철탑업훈장까지 받았다. 그리고 1970년 11월10일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 23만평 부지에 대단위 종합자동차공장을 세우는 대역사에 착수했다.
사실 소하리 공장 건설공사는 기아의 사운을 건 대역사였다. 30억원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던 총공사비가 예상을 깨고 3년 동안 무려 100억 원이 투입됐다.
산업은행에서 일반시설자금 4억원, 제일은행과 한일은행에서 기계공업육성자금 6억원 등을 대부받았으나 자금압박은 대단했다. 그러나 시흥공장을 건설할 때처럼 위기에 직면한 상황은 아니었다.
1969년도에 비해 다소 이익이 감소했지만 1970년 5억, 1971년 3억, 1972년 4억 원 등 여전히 흑자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 소하리공장은 1973년 6월에 준공됐고 엔진·주물·기공·금형·프레스·차체·차축·도장·조립공장 등 단위공장의 집합체로서 연산 2만5000대의 생산규모였다.
그 후 이 공장은 88년까지 연산 20만대 규모의 공장으로 확장되지만 당시에도 일관공정시스템을 갖춘 소하리공장의 준공은 한국자동차공업의 자동화시대를 여는 또 하나의 큰 걸음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교통신문에서 펴낸 한국자동차70년사(윤준모 著)는 소하리공장의 준공과 의의를 "기아의 소하리공장은 김철호 사장이 회사설립 이후 30여 년간 끊임없는 집념과 의지로 이룩해 놓은 피와 땀의 결실이다. 그는 만년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순수한 민족자본과 독자적인 노력으로 엔진, 주물, 금형, 프레스, 조립공장에 이르기까지 연산 2만4000대 규모의 이 공장을 완성했다. 그는 자동차 완전국산화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 했지만, 그의 자동차국산화를 위한 집념과 정성이 깃들인 이 공장은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을 선도하고 자동차 완전국산화를 이룩하는 터전이 됐다"고 적고 있다.
어쨌든 김철호 사장은 그의 평생 꿈인 대단위 종합자동차공장을 완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완성된 소하리공장의 모습을 불행하게도 병실에서 슬라이드를 통해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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