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스페설]금호고속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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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스페설]금호고속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멉니다”
  • 정규호 기자 bedro10242@naver.com
  • 승인 2012.0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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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택시 2대로 출발...‘행복을 만드는 기업으로 성장’
국내 운송업 주축서 세계로 활짝...종착역은 ‘고객행복’

2012년은 금호고속이 66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1946년 덜덜 거리는 택시 2대로 시작한 금호고속. 이젠 대한민국 육운업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고속버스는 이제 국가 경제와 국민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혈맥이자 기업 번영과 경쟁력 제고의 원천이다. 일각에서는 KTX와 비행기의 발전으로 고속버스의 입지가 줄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고속버스가 도로에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기 때문에 이들의 성장도 온전 할 수 있었다. 또 우리나라가 6.25 전쟁 후, 황무지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혈관처럼 뻗어있는 고속버스 노선이 큰 힘이 됐다. 그리고 금호고속은 이러한 배경속에서 고속버스 업계의 장남 역할을 지금까지 맡아오고 있다. 지난 66년여 세월의 흐름 속에 금호고속은 이런 고속버스 업계를 대표하며 굵직한 역사들을 기록했다. 어떤 흔적을 남겼고, 앞으로 어떤 역사를 쓰게 될 것인지 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태동기
6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2년 조선시대 처음으로 택시가 등장해 해방무렵까지 362대로 늘어난다.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영업용 택시는 유망사업으로 부각되고, 금호고속의 창업주인 고 박인천 회장은 1946년 4월 7일 택시 2대로 금호고속의 전신인 ‘광주택시’를 창업한다. 당시 택시는 중고로 구입한 미국산 포드 디럭스 35년형과 내쉬 35년형으로, 광주에서는 택시영업을 처음 개시한 승용차다. 덜덜거리며 거리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정도로 자동차 자체가 신기한 시대였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지난 2005년 3월에는 창업당시 운행한 포드 디럭스 35년형을 직접 구입했을 정도로 전신기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광주택시’는 2년 후인 1948년 광주여객자동차(주)를 설립하고 호남과 장성을 잇는 시외버스 운송사업을 최초로 개시한다. 금호고속이라는 기업의 윤곽은 바로 이 때부터 마련된다. 일반 트럭에 호로를 씌어 개조한 버스는 광주 사람들의 발이 되었고, 수년이 지나지 않아 광주 제일, 호남 제일의 버스회사로 도약하게 된다.

하지만 광주여객의 성장세는 몇년 지나지 않아 꺾이고 만다. 6.25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은 무력침공함으로 남한 전지역은 초토화됐고, 전남 지역도 그 피해를 피해갈 수 없었다. 광주여객의 자산인 자동차는 철저히 파괴되거나 군수물자로 빼앗겼다. 3년 후 전쟁은 휴전됐지만 전국의 육상교통은 마비되고, 전남지역의 사정도 똑같았다. 무너진 건물 잔해로 도로는 구분할 수 없었고, 사람이 지나가는 곳이 곧 도로였을 정도로 황폐했다. 광주여객도 모든 걸 잃었다.

-성장기
이런 상황속에서 고 박인천 회장과 임직원들은 광주여객 재건에 혼을 쏟아부었고, 마비됐던 전남지역의 육상교통은 하나 둘씩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이 무렵 광주여객의 재건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전남도내 전체 버스의 36.7%에 해당하는 58대(1953년 기준)를 광주여객이 보유하면서 어느새 명실상부한 호남권 최대 운송회사로 재도약한다.

66년이 흐른 지금도 금호고속이 전남을 상징하는 기업으로 칭송받는 이유도 어쩌면 6.25전쟁 후 고난과 역경의 역사를 전남 시민과 함께 일궜기 때문일 것이다. 광주여객은 호남 제일의 운송사로 만족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재도약 기점을 발판 삼아 전국 노선 확보를 위한 전략적 진출에 관한 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먼저 광주여객이 가지고 있는 충천 노선은 대전-목포가 전부였다. 당시 대전과 천안은 전라도, 경상도 승객들이 서울로 올라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하지만 전쟁 후 도로 복구가 끝나지 않아 승객들은 열차로 몰렸고, 객차 부족 현상으로 서울로 가려는 승객들의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광주여객은 이러한 수요와 공급을 간파하고, 광주-대전 노선에 진출한다.  노선 신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충청도 당국과 지역 운수업체들의 반발이 컸던 것이다.

끈질긴 설득 끝에 노선을 획득했지만 영업은 기대에 못 미쳤다. 비포장도로와 장시간 운행으로 승객들의 불편이 컸고, 도로 복구가 빠른 시일내에 이뤄져 서울행 열차가 곧 복귀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리고 결국 7개월만에 사업에서 철수한다.

한편, 광주-대전과 함께 진출했던 노선이 하나 더 있었다. 전남과 전북을 잇는 광주-전주 노선이다. 이 역시 전북지역 운송업체들의 반발로 쉽지 않았지만 집요한 설득끝에 노선은 개설됐다.  1954년 10월부터 광주-전주 노선에 4대의 버스를 투입했고, 하루 2회 왕복 운행(110.8km)을 시작했다. 3년 후인 1957년 6월 22일부터는 급행노선을 처음 도입해 일반버스보다 50분 단축하는 노선 다양화를 꾀하기 시작한다. 이로써 광주여객은 광주-전주 노선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면서 호남지역을 넘어 전국구 운송업체의 기틀을 마련한다.

다음 진출지역은 부산이었다. 광주와 부산의 경우 인적, 물적교류가 활발함에도 불구하고, 소백산맥이 자리잡고 있어 대전을 거쳐 가거나 배를 이용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게다가 오랜 지역감정으로 인해 광주여객의 부산 진출은 당시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끈질긴 진출 끝에 부산운송업체와 공동경영체제 구축을 통해 1955년 부산 노선 마저 확보하게 된다. 1956년에는 대구 노선 진출 등 전남-경남을 잇는 지역노선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혁신기
산업발전시기와 맞물려 그칠줄 모르던 성장세는 1956년 5월 주춤하게 된다. 정부에서 시행한 ‘5.8라인’, 즉 T/O제를 골자로 한 강력한 휘발유 소비체제조치 때문이다. 사실 이 정책은 주춤정도가 아니라 우리나라 전 운수업계를 경영난에 빠지게 한 사건이었다. 휘발유 말고 그 어떤 연료도 상용화되지 못했고, 타 연료를 소화해 낼 부품 검증도 이뤄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휘발유를 쓰지 말라는 제재는 사업을 하지 말라는 뜻과 같았다. 무언가 타개책을 마련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운송사들은 아사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에 광주여객은 버스업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도전을 하게 된다. 업계 최초로 휘발유 엔진을 디젤엔진으로 교체하는 사업을 단행키로 결정한 것이다. 요즘 시대는 기술력 발달과 정보공개로 부품 교체 리스크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엔진같은 부품 교체는 기업의 생존이 걸린 사업이었다. 엔진 교체 사업은 수 일 동안 밤을 새워가며 노력한 임직원들의 노력 끝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경영난을 일찍 타개하면서 위기는 기회로 바뀌었다.

인수합병을 통해 광주여객은 어느새 140개 노선, 139대 버스 보유하게 됐고, 여세를 몰아 1960년에는 삼광여객, 전남여객 등 같은 굵직한 업체를 인수하며 전국구 운송업체의 외형을 갖추게 됐다. 이후 1963년 3월 전주-논산, 1966년 5월 논산-공주-천안 노선까지 진출하면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진출을 목전에 앞두게 된다. 서울행 직행버스 노선은 전국 제일 운송업체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할 첫 관문이었다. 서울지역 운송업체들의 반발도 거셌지만 1967년 8월 10일 드디어 광주-서울 급행노선을 확보한다. 전남, 경남, 충청도 노선 획득의 노하우가 큰 도움이 됐다.

이로써 광주여객은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를 이어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까지 노선을 확보함에 따라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제일의 운송업체 조건을 갖추게 된다.

-확장기
1993년 광주여객은 금호고속으로 회사명을 바꾸고, 금호그룹의 모태회사이자 중추적인 회사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전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다. 지난 1995년 중국 진출을 시작으로, 2007년 베트남, 이듬해 캄보디아까지 확장하면서 전 세계에 금호고속의 노선을 그리는 중이다. 금호고속의 이러한 진출은 운행비를 받고, 목적지까지 이동시켜 주겠다는 단순한 목표가 아니다. 승객 한사람 한사람에게 추억을 선사하고,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 주겠다는 마음에서다.

금호고속은 더 이상 매출, 순이익 등을 최고 가치로 두지 않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경영 가치체계의 변화도 이 부분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김성산 금호고속 대표는 매일 사내통신망인 텔리피아 홈페이지를 통해 행복의 정의를 공유한다. “승객이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버스를 타러 왔을 때, 불쾌하게 하지 않고, 즐겁게 해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은 일상을 즐겁게 해 드렸기 때문에 틀림없이 고객행복에 기여가 될 수 있다”(7월 20일 ‘우리들의 행복’ 김성산 대표 글 발췌) 때문에 임직원들도 “어떻게 하면 행복을 전달할까?, 어떤 추억을 선사할까?”라는 보람찬 고민에 빠져있다.

6.25 전쟁 후 아무것도 없는 절망속에서 고 박인천 회장과 임직원들은 호남 시민들의 교통수단 재건을 위해 혼을 쏟아 부었다. 이제는 금호고속이 그 바톤을 이어받었다. 여행을 할 때 행복과 추억을 선사하는 교통수단이 되기 위해 김성산 대표와 임직원들이 피와 땀을 쏟고 있다. 때문에 금호고속의 종착역은 고객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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