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국 박사의 모빌리티 르네상스] 사람 중심 교통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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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국 박사의 모빌리티 르네상스] 사람 중심 교통으로 돌아가자
  • 교통신문 webmaster@gyotongn.com
  • 승인 2023.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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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 시대에 사회·문화의 중심은 사람이었다. 그리스 신화에는 사람들의 일상, 사회·문화, 정치 등 심지어는 사람의 감정까지도 담당하는 신들이 존재한다. 신들이 인간과 같은 사회를 구성하며 사람의 감정을 가졌다는 것은 이 시대가 사람 중심의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5세기 서로마가 게르만에게 멸망한 시점부터 15세기 오스만 제국에게 동로마가 멸망했을 때까지 유럽의 사회와 문화는 기독교가 지배했다. 종교에 대한 학문과 예술만이 존재할 수 있었고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예술은 이단시됐다.

15세기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연구하던 동로마 학자들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도피해 서유럽으로 건너오면서 르네상스가 유럽에서 시작된다. 아름다움의 신 비너스의 탄생을 그린 보티첼리의 그림을 시작으로 인간의 몸을 연구한 미켈란젤로의 아름다운 조각, 종교를 풍자하고 사람의 연애 감정을 담은 세르반테스의 소설 등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 그리스, 로마 시대와 같이 종교가 아닌 사람을 중심으로 한 문화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르네상스의 라틴어 어원은 ‘르’-‘다시’, ‘네상스’-‘태어남’이다. 즉 르네상스는 사람 중심의 사회·문화가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흥미롭게도 교통의 역사는 인간 중심 그리스·로마 시대, 종교 중심 중세 시대, 다시 인간중심으로의 르네상스를 거치는 서구의 역사와 무척이나 닮아있다. 도로의 주인이 사람에서 자동차로 바뀌었다가, 다시 자동차에서 사람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독일의 카를 벤츠가 최초의 내연기관 엔진 자동차를 만들었을 때 자동차는 일부 귀족들만 구입이 가능했던 사치품이었고 도로에서 보기 드문 물건이었다. 포드가 대량으로 자동차를 싼값에 생산하기 전까지 도로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좌판이 벌어지며 사람들이 자유롭게 거닐던 공간이었다. 즉 도로의 주인은 진정 사람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포드의 대량생산 자동차 모델T가 등장하면서 자동차는 중산층 가정의 필수품이 됐고 사람들은 도로 바깥으로 쫓겨났다. 자동차가 도로의 주인이 된 것이다.

자동차가 도로를 가득 메우게 되자 그 전처럼 도로 가운데를 편안히 거닐던 보행자와 사고가 잦아졌다. 보행자를 위협하는 자동차의 등장에 화가 난 미국 시민들은 자동차 속도를 규제하는 법을 만들고자 시도했다. 이 법이 등장한다면 자동차 판매가 줄어들 염려가 있으므로 이 시도는 오히려 자동차 제작사들이 보행자를 도로 밖으로 몰아내는 법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횡단보도가 아닌 곳에서는 도로를 횡단할 수 없고 보행자는 자동차를 피해 도로 바깥쪽이나 보도로만 통행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자동차 중심 도로 질서로 인해 기존에 도로 전체 공간을 자유롭게 거닐던 시민들은 무단횡단자로 전락했다. 자동차 제작사는 자동차 통행을 방해하는 보행자의 무단횡단을 막고자 이들을 촌스러운 사람으로 치부하는 전략을 시도했다. 자동차 제작사의 광고 수익에 의지하는 신문사들은 무단횡단자를 ‘jaywalker’라고 불렀다. 여기서 ‘jay’는 도시에 처음 와서 도시 문화를 모르는 사람, 즉 ‘촌사람’을 의미한다. 무단횡단하는 사람을 촌사람으로 조롱해 무단횡단을 막고 자동차 통행을 우선하는 문화를 조장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은 급격한 경제 발전을 이루게 됐고 자동차가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도로 정체가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됐다. 1960년대에 영국은 교통사고와 대기오염 등 자동차의 부정적 영향을 최초로 제기했고 50km/h 도시부 속도 제한을 최초로 도입했다.

1970년대 네덜란드 운전자들은 간선도로 정체가 너무 심하니 주택가 골목길마저 통과용 도로로 이용했다. 어린이가 뛰노는 공간을 자동차에 빼앗긴 주민들은 골목 입구를 막는 방식으로 자동차의 무분별한 통행에 시위했다. 시 당국은 자동차 통행을 허용하되 주택가 도로의 자동차 속도를 보행 속도 수준으로 규제하는 방식을 채택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보너프(woonerf)의 탄생 배경이다.

1980년대에는 네덜란드의 보너프와 유사한 제도들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독일은 주택가 또는 상업지역 등에서 제한속도를 30km/h로 두는 ‘30존’을 도입하고 1990년 이를 법제화했다. 덴마크와 프랑스는 마을과 도시를 통과하는 도로의 제한속도를 낮추고 교통정온화 시설을 설치하는 프로그램을 전국적으로 시행했다. 1985년 프랑스는 차대 사람 사고 시 보행자의 민사적 책임을 면제하는 Badinter 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자동차가 가진 근원적 위험을 인정했다는 측면에서 의미를 가지며 2002년 유럽연합에 속한 모든 나라에 적용됐다. 바야흐로 이제 도로의 주인이 자동차에서 다시 사람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교통안전 수준은 경제력에 비례한다. OECD 국가 예를 들면, 2020년 기준 멕시코의 1인당 GDP는 8700불이고 인구 10만명당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11명이다. 이탈리아는 3만2000불·4명, 스웨덴은 5만3000불·2명이다. 국민소득이 높아지면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낮아지는 이 패턴은 매우 일관된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이탈리아와 유사한 국민소득을 갖는 우리나라의 인구 10만명당 사망자 수는 6명이다.

우리나라가 경제력에 비해 안전수준이 낮은 것은 사람 중심 정책을 매우 늦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사람 중심 교통정책의 핵심은 자동차의 속도관리이다. 속도가 낮을 때 사고를 회피할 확률이 높아지며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부상 정도를 크게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은 1인당 GDP가 10000불 수준인 1980년대 자동차 속도관리정책을 적극 도입했다. 우리나라는 1인당 GDP가 30000불을 넘어선 2021년에야 이것을 도입했다.

교통의 목적은 사람과 물자를 안전하고 빠르게 이동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성장과 속도에만 집중한 나머지 사람의 안전에 신경쓰지 못했고 그것이 경제력에 비해 낮은 안전 수준으로 나타났다.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유럽이 1980년대~1990년대에 걸쳐 자동차 중심에서 보행자 중심으로 교통을 바꿔갔듯이 우리도 사람이 주인이 되는 교통으로 돌아가야 한다. 보행자, 자전거, 킥보드와 같이 사람 중심의 교통수단이 도로의 주인이 되고 우선되는 르네상스를 만들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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