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교통신문40=<26>자동차공업 입국의 시작 '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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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교통신문40=<26>자동차공업 입국의 시작 '80년대'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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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현대 이어 대우도 경쟁 가세

대우, 공격적 수출드라이브로 질주
'르망' 개발로 일약 선두그룹 형성
국내 최초로 동구권 진출 등 기염


자동차공업은 규모의 경제가 크게 작용하고 높은 기술수준을 필요로 하는 한편 자동차를 구성하고 있는 각종 부품의 생산에서부터 완성차 조립까지는 수많은 공정단계별로 이뤄지는 자본 및 기술집약적인 종합기계예술일 뿐 아니라 관련 산업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고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수출산업의 중핵이 되는 전략산업이며 공업선진화를 이룩하기 위한 필수산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자동차공업 입국으로서 발판을 구축한 것은 자동차생산의 다원화시대를 맞은 80년대초 부터이다. 석유가격의 인하, 저물가, 저금리 등 이른바 '3저현상'이 나타나 세계경제는 회복국면에 들어가고 한국, 싱가포르, 대만, 브라질 등 일부 개발도상국들이 이러한 세계경제의 흐름을 활용해 경제개발에 성공함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한국은 '제5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제1차년도인 1982년, 현대자동차가 일본의 미쓰비시자동차 및 미쓰비시상사와 합작계약을 맺음으로써 신차개발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으며 이해 12월에는 새한자동차도 대우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해 신차개발에 주력할 채비를 갖추게 됐던 것이다.
이에 따라 현대의 포니2 및 스텔라, 대우의 맵시나와 로얄, 기아의 봉고가 새로운 국내 주력차종으로 등장하기에 이르렀으며 각 자동차회사가 자체의 기술연구소를 설치해 독자적인 주요기능부품의 설계능력 배양으로 1984년도에는 국내의 거의 모든 승용차의 국산화율이 약 90% 이상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고 1983년11월 캐나다에 현대 포니2가 첫 수출됨으로써 우리나라 자동차회사의 외국현지판매법인 설립을 통한 대량수출의 활로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1985년 2월에는 현대가 생산한 전륜구동승용차 엑셀과 프레스토가 세계최대의 자동차시장인 미국에 상륙했고 1987년도 기아산업도 정부의 국내자동차 회사에 대한 생산차종 제한조치의 해제로 승용차생산을 시작했다.
또 1988년에는 동아자동차가 쌍용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했고 이해 9월에는 앞으로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의 발전에 초석이 될 한국자동차공업협회가 발족된 가운데 대우와 기아도 각각 GM과 마츠다와 협력, 르망과 페스티바를 미국에 대량 수출하는 등 내수 및 수출증가에 힘입어 108만여 대를 생산함으로써 최초로 자동차생산 1백만 대를 상회하는 빛나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이미 소개한바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공장은 현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평공장은 한국자동차산업에 태동기인 1962년 일본차 새나라를 조립했던 곳이다. 그러나 부산에서 한국 최초의 세단형 승용차 신성호를 제작한 신진공업이 이 공장을 1963년에 인수하고 일본의 토요다자동차와 기술제휴로 신진자동차공업을 출범시켰다.
신진공업은 1972년 1월 토요다가 한국에서 철수함에 따라 이해 6월7일 미국의 GM과 합작으로 '지엠·코리아자동차'를 설립, 비로소 본격적인 생산 활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 새한자동차로 바뀌어 세계 40여 개 국에 완성차를 수출하는 국제적인 자동차메이커로 부상해 갔다. 그러나 수출량은 대단치 않았다.
대우는 1978년부터 새한자동차 경영에 참여하다가 1983년 GM으로부터 경영권을 완전히 인수, 대우자동차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함으로써 독자적인 경영전략을 펴기 시작했다.
대우는 경영·생산·판매 등 전 분야에 걸쳐 일대혁신을 단행, 소형승용차부문에서 맵시나, 중형승용차부문에서 로얄시리즈를 비롯해 에어로다이나믹 스타일의 로얄고속버스·트럭 및 특장차를 개발, 시판해 소비자들로부터 각광을 받아왔다.
1984년 6월에는 GM과 더불어 월드카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첨단자동차의 최신설비를 갖출 수 있는 새 공장의 건설, 부품업계의 육성 등 야심적인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한편 1986년 7월 마침내 수출전략형의 르망승용차를 개발했다.
르망은 공기역학을 최대로 이용한 물방울모양의 유선형으로 컴퓨터조절 점화시스템(MSTS)을 채택한 내수용 1500cc급과 수출용 1600cc급의 엔진을 탑재한 최신 에어로다이나믹 스타일의 승용차였다.
르망이 국내시장에 첫 선을 보이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단숨에 단일차종 최다판매를 기록하는 등 소비자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결국 국내시장의 르망붐은 미국 등 세계 각국으로 이어졌으며 미국에선 '가장 잘 팔리는 차'의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따라서 대우자동차는 국내외의 수요증가에 대비, 1986년 9월 생산라인의 증설계획을 수립하고 1000여억 원을 투입, 1988년 2월 연간 33만 4000대 규모의 시설을 완공했으며 펜타파이브의 개발로 모델 다양화에도 주력, 선택폭을 넓혔다.
대우자동차는 중형차부문에서도 괄목할만한 실적을 올렸다. 1972년 레코드1900의 탄생으로 국내에 본격적인 고급 승용차시대를 연 이루 성능과 안전성을 더욱 향상시키면서 스타일을 다양화, 국내시장에서 참신한 이미지를 굳혀갔다.
1980년에 개발한 로얄살롱은 안전도와 품위를 높여 정상급 승용차의 자리를 구축하였으며 레코드1900에 이어 1983년에는 로얄프린스가 개발돼 고급 승용차의 명성을 계승했다. 또 이해 1500cc급 XQ엔진을 탑재한 로얄XQ도 생산, 경제적인 중형차로 소비자들의 선택의 기회를 넓게 했다.
1987년엔 산업합리화조치가 해제됨에 따라 중·소형 트럭시장에도 뛰어들었다. 특히 승용차 감각을 느끼게 하는 스타일의 1t 트럭 바네트와 2.75t 엘프Ⅱ를 생산,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1990년은 자동차업계의 신차개발 경쟁이 치열했다. 대우는 소형승용차로서는 국내 최초로 엔진의 이상을 알려주는 자기진단장치가 채택된 전자연료분사방식 엔진을 장착한 1989년형 르망을 개발, 국내 자동차업계의 전자화를 주도했으며 실내공간을 보다 넓혀 안락성을 극대화한 1990년형 르망도 개발·시판했다.
또 성능 및 내 외장을 고급화시킨 1990년형 로얄도 성공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도 국내 최초로 컴퓨터작용 브레이크시스템인 ABS를 채택, 성가를 높이는 등 대형승용차시장에서도 우위를 점해갔다.
1987년 4월부터 대미 수출을 시작으로 본격화된 르망 수출은 이해 10월 캐나다 수출로 이어졌으며 1990년 상반기에는 체코에 3000대를 수출함으로써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동구권에 진출하기도 했다.
한편 대우는 1987년부터 독자적인 고유모델을 개발하겠다는 의지로 페라리, 람보르기니, 알파로메오 등 유명메이커의 명차들을 디자인했던 세계적인 자동차전문회사인 이탈리아의 베르토네회사와 디자인기술제휴를 맺어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볼 수 없었던 최신 풀에어로다이나믹 스타일의 2000cc급 J카 개발에 착수했으며 이로 인해 대우는 완벽한 승용차라인업 구축을 가져올 것으로 보여 관련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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