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년&교통신문40=<4>1969년 1월15일 전국버스 총운휴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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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년&교통신문40=<4>1969년 1월15일 전국버스 총운휴 공방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02.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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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라…안된다" 초유의 버스요금 공방

요금투쟁자금 거둔 업자들 검찰행
서울에서 전차 사라지고 도로 증설
본지 지면에 연재소설·만평 등장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을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로 정하고,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 이를 다짐했다. 서울시는 이에 호응하듯 정초부터 창의문에서 연희입체교차로에 이르는 환상도로 등 42건에 달하는 건설공사를 일제히 기공했다.
그런데 1월 8일 전국버스업자들은 더이상 적자운영을 더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1월 15일을 기해 총운휴에 돌입하겠다고 교통부에 통고했다.
"운임을 올려달라", "못올린다", "그러면 운휴를 단행하겠다", "못한다" 등으로 14일까지 대화가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전면운휴 예정시각 다섯시간을 남겨 놓고 결국은 무승부로 끝나고 말았다.
14일 오후 늦게까지 50여 명의 보도진과 20여명의 수사기관원들이 회의장 밖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교통부회의실에서 옥신각신 3시간 격론 끝에 '표준원가제에 의한 요금재조정'을 3월 31일까지 연기한다는 선에서 일단락됐던 것이다. 말하자면 정부는 아슬아슬하게 고비를 넘겼고 버스업자 측에선 그런대로 타협명분을 찾을 수 있었다.
회의가 끝나자 13명의 버스업계 대표들은 그 길로 회의장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사관들에 의해 검찰청으로 연행됐다. 버스업계 대표들은 요금인상 투쟁자금으로 버스 1대당 1만 원씩 4천2백만 원을 거뒀던 것이다.
당시 전국 버스 총 대수는 9440여 대였는데 운체의 영세성으로 1인 2대 미만의 차주가 무려 94.7%나 됐다. 영세차주들의 운영비를 보면 인건비가 12.2%, 수리비가 32%로, 당시 일본의 인건비 37.8%, 수리비 17%와 비교하면 좋은 대조를 보였다.
이 운휴파동에 대해 당시의 매스컴은 연일 사설·기사·만화·칼럼 등을 통해 버스업계의 부당성을 지적했고, 일부 운수업자들도 "업자들의 운임인상 투쟁은 이해하나 공익사업이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서 운휴에 가담하지 않고 정상대로 운행하겠다"며 투쟁에서 이탈했다.
2월 1일, 62년 4월에 기공한 전남완도와 육지를 잇는 연육교 189m가 기공 6년 10개월 만에 완공됐고, 2월 11일 박 대통령은 지방장관회의 겸 연두순시 종합평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도로 폭 확대 계획 등을 지시했다.
이 무렵 영동지방에는 폭설이 내려 강릉, 속초시가 완전 고립되고 가옥 130여 동이 붕괴되는 등 피해를 보았다. 특히 설악산의 강설량은 2 10㎝를 기록했는데, 이 때 해외 원정 등반훈련대원(대장 이희성) 등 10명이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를 만나 모두 묻혀 죽었다.
이에 앞서 1968년 12월 1일은 서울에서 전차가 일제히 그 모습을 감춘 날이었다. 고속전철화와 자동차에 밀려 교통의 장애물로 낙인이 찍혔던 것이다.
사실 그동안 서울시민들의 활동과 휴식은 전차소리가 좌우했다. 당시 지금의 동대문 근처가 전차의 야간 차고지였는데 여름에는 새벽 4시경부터 전차운전사들이 도시락을 끼고 몰려들면 첫차가 5시 정각에 서울역을 향해 출발했다.
'땡!땡!땡' '덜거덕 덜거덕'하는 전차 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며 각 가정에 들려오면 이것이 아침을 알리는 신호가 되어 잠자리에서 일어나 활동을 개시했고 밤이 되어 전차소리가 멈추면 "벌써 전차가 끊겼군"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전차가 가장 많이 움질일 때는 하루 190대가 50만 명의 시민을 실어날랐다.
전차가 서울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898년 1월 18일 이었다. 미국인 골브란과 보스트위크가 고종의 윤허를 받아내 미국인 운전사를 수입해 들여와 황실용 1대와 영업용 9대로 운행을 개시한 후 70년 동안 숱한 민족의 애환과 에피소드를 남기며 서민의 벗이 되었던 것이다.
1969년에 접어들자 3월 4일 김현옥 서울시장은 남산에 지하십자도를 개발하겠다고 공표하고 3월 13일 지하터미널공사를 기공했는데 소요경비는 10억 1백만 원을 예상했다.
또 3월 22일엔 삼·일 고가도로 3750m가 준공됐는데 이것을 계기로 서울의 모습도 해마다 변해갔다. 4월 7일 창경원 앞(원남동)과 신당동 입체교차로가 준공되는 등 자동차 소통율이 높아져 가는데도 자동차 수요를 뒤따르지 못해 교통사고는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그래서 정부는 이 무렵 각의를 거쳐 '자가용등록제한조치'를 단행하고, 경찰은 5월 21일 0시를 기해 서울 등 6개 도시에 교통비상령을 내렸으며 차량 811대와 보행자 2천여 명을 단속했으나 사고·사망률은 별로 줄지 않았다. 그만큼 시민들의 질서의식이 희박했기 때문이었다.
7월 21일 미국우주인들이 인류최초로 달 세계를 정복했다. 아폴로 11호의 착륙선이 달 표면에 가뿐히 내려, 우주인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사다리를 타고 조심조심 달 표면에 첫 발을 내딛는 장면은 감격과 간탄을 자아내게 했다.
이들이 내린 '고요의 바다'는 마치 축축한 느낌의 회색 먼지로 덮여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발자국이 뚜렷이 나타났다. 세 우주인이 달에서 채취한 31.5㎏의 암석을 갖고 태평양에 무사히 착수 귀환한 것은 7월 24일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1969년 교통신보의 지면은 질적 변화를 도모한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우선 창간 이후 다소 산만했던 지면 구성내용을 정리해 면별 기사배분 원칙을 도입, 지면 특화를 시도해 눈길을 끈다.
특히 1969년 9월부터는 당시 도하 일간지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던 연재소설이 교통신보에도 등장했는데 문흥도 씨가 집필하고 이오봉 씨가 그삽화를 그린 '잘 해보쇼'라는 제목의 장편소설이 실리기 시작한다.
소설은 산업산회로 발돋움하던 시대상을 반영, 젊은 셀러리맨의 직장생활과 일탈, 희로애락 등을 다뤄 전형적인 신문연재 소설의 범주에 드는 것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이 시기 교통신보 지면에 간헐적으로 만평 '交通戱評'이 실리곤 했는데 이 만평은 현재도 고정란으로 실리고 있으니 그 역사성이 무려 36년에 이른다는 점이다.
이 해 3월에는 교통신보의 자매지 '월간교체계'가 창간돼 교통체신 분야의 전문잡지로 첫 발을 내딛었다.
'월간교체계'는 이후 '월간교통', '자동차저널' 등의 제호로 변경 발행됐으나 90년대 들어 잡지 홍수속에서 그 수명을 다하고 말았지만20년 이상 명맥을 이어오면서 교통신문의 정예 기자를 양성하는 산실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해 창간 3주년 무렵 당시 교통부장관이던 강서룡 씨가 창간 축하 휘호로 '수송력의 효율적 강화'라는 글을 펜글씨로 적어 신문사로 보내온 것이 그대로 실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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