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교통신문40=<5>1970년 자동차대중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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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교통신문40=<5>1970년 자동차대중화시대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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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進 주도의 자동차산업에
현대, 기아산업 등 도전장


육상운송 철도서 자동차로 급속 이전
화장실 딸린 그레이하운드고속 인기
교통신문 70년부터 주 24면 발행 개시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자동차 산업은 서서히 그 발판을 굳혀갔다. 상공부는 1월 7일 70년도 자동차 생산량을 5만6000대로 확정, 발표했다.
이 무렵 동국제강그룹의 장상태 사장이 이탈리아의 피아트社와 제휴, 아시아자동차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전남광주공업단지에 공장을 세워 승용차 '피아트124' 생산을 서둠으로써 현대·신진과 더불어 3대 메이커가 경합하는 3원화 정책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낙선 상공부장관은 신진자동차공업에 엔진주물공장을 건설케 할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현대는 이미 포드승용차 외에 'D-800 포드덤프트럭'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3개 자동차메이커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신진자동차공업이었다. 4월 15일 신진지프차 조립공장이 준공됨으로써 사실상 국제수준에 육박했다.
자본금 40억 원에 종업원이 5000명이나 됐으며, 전국 곳곳에 생산공장을 세우는 등 국내 규모로는 최대였다. 그 내역을 보면 부평공장이 대지 50만 평에 공장건물 2만 평, 부산공장이 대지 5만5000 평에 건평 5000 평, 부산진구 주례공장의 대지가 4만 평에 공장건물이 4천 평, 용산 서비스센터가 대지 2000 평에 공장건물이 300 평이고, 자본금 4억 5천만 원의 신진자동차판매회사 외에 방계회사로 인천에 있는 한국기계공업, 영등포에 있는 신진학원, 하동환자동차공업, 현대기어공업, 부산에 있는 대원강철공업 등 실로 방대한 규모의 업체가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5월 20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자동차공업현황을 보면, 69년에 생산실적 3만1100 대를 기록, 전년에 비해 69%나 증가했다. 또 부속품수입 6000만 달러, 국산환율 38%라고 지적했다.
이날 현대자동차에서는 신형 '코티나' 판매를 개시했으며 외자도입심의위원회는 2천800만 달러와 자본재도입 등 6975만 달러의 신규차관 도입을 허가해 또 하나의 정유공장이 생겨나게 됐다.
이 해 가을에는 기아산업이 시흥군 서면 소하리에 대지 20만 평을 매입, 엔진공장·주물공장·차체공장·기계공장·도장공장·조립시설 등 일관작업이 가능한 근대식 종합자동차공장 건설공사를 착공하는 등 국내 자동차메이커들은 자동차생산 경쟁의 본격적 기반을 다지고 있었다.
70년 말 자동차등록대수를 보면, 모두 12만9371대로 1년 동안 2만702대가 증가했다. 그러나 자동차생산실적은 3만3058대로 당초 상공부가 발표한 70년도 생산목표 5만6000대에는 훨씬 못 미치는 실적이었다.
여기서 60년대(60년∼69년) 교통부문의 전반전인 발전상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70년의 교통인구 증가율을 보면 땅·바다·하늘을 통털어 총 21억 명을 기록했다. 이는 69년에 비해 7.7%가 증가한 것이다. 그만큼 수송인구는 해마다 급증했고 화물수송도 26억 t을 기록 69년보다 24.6%가 늘어났다.
말하자면 사회가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인구의 도시집중이 심화되고 도로의 발달로 철도보다 자동차로의 이동이 급증했던 것이다.
이것은 철도 여객수송실적에서도 잘 나타났다. 자동차여객수는 100%가 늘어났으나 반대로 철도수송은 11.4% 감소했다. 좀 더 상세히 따져보면 철도여객수송실적은 70년 1억3120만 명으로 69년도 1억5070만 명에 비해 15.2%가 감소했고 수송거리도 98억 2000㎞로 69년보다 11.3%가 하회했다.
다만 화물의 경우만은 3155만1000 t으로 5.2%가 증가했던 것이다. 또 철도운영 면에서도 여객수입 195억 원, 화물수입 112억 원, 기타수입 39억 원이었는데 이는 당초목표액에 비하면 무려 106억 원의 차질을 빚은 것이다.
반면 자동차 이용률을 보면 총 수송인원이 27억4377만 명으로 69년보다 13%가 증가했다. 이 자동차수송부문을 다른 수송수단과 비교하면 70년도 총 여객수송인원 중 95.2%를 자동차가 분담했고 수송 거리에 있어서는 자동차의 분담률이 66%에 이르렀다.
또 자동차의 화물수송량도 6175만 t으로 69년보다 9.2%, 수송거리 14억2070㎞로 69년보다 10.3%가 증가했다. 이 같은 수치는 우리나라도 바야흐로 자동차대중화시대가 열려가고 있음을 실감케하는 것이었다.
항공부문도 자동차 다음으로 신장률이 높았다. 70년도 항공여객은 39만 2705명으로써 비행거리는 4억 5756만 ㎞였으며 화물수송량도 1만 6740 t으로 69년에 비하면 145%의 증가율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가장 눈부신 발전은 역시 자동차부문으로 자동차보급도 857명 당 1대의 비율에서 248명 당 1대의 비율로 약 3∼4배나 신장됐다.
경부, 경인고속도로가 완공돼 제기능을 발휘하자 우리나라는 1971년부터 고속버스 우위시대가 열려지고 있었다.
서울∼인천간 39㎞ 구간을 한진이 모두 30대를 투입해서 매 5분 간격으로 서울역전터미널을 떠났고, 삼화고속이 20대를 가지고 역시 매 5분 간격으로 종로5가에서 출발했는데 운임은 1인당 130원을 받았고 소요시간은 55분이 걸렸다.
또 경부고속도로는 서울∼대전 간 1백 68.7㎞ 구간은 한진이 11대를 투입, 매 40분 간격으로 출발했고, 동양고속이 13대, 코리아그레이하운드가 7대, 광주고속 4대, 천일고속 4대, 한일고속 4대, 한남고속 4대 등을 각각 투입해 매 30분 또는 20분 간격으로 운행했으며 운임은 580원을 받았다.
서울∼대구 간 327㎞ 구간은 한진 13대, 동양고속 12대, 광주고속·천일고속·한일고속·한남고속에서 각각 7대씩 모두 28대를 투입해 평균 30분 간격으로 운행했는데 운임은 1160원을 받았고 소요시간은 4시간이었다.
한편 서울∼부산간 454.5㎞의 고속버스 운행은 경쟁이 치열했다. 우선 한진이 14대, 동양고속 12대가 매 1시간 간격으로 다녔고 코리아그레이하운드의 17대를 비롯해 광주, 천일, 한남고속이 각각 7대씩 모두 28대를 투입해 매 30분 간격으로 1600백 원을 받고 5시간 24분을 달렸다.
당시는 그레이하운드의 차종이 인기를 끌었다. 외제차종에 냉방·화장실까지 설치됐으며 안내양의 예쁜 모습이 지루한 승객들을 즐겁게 했다. 특히 안내양들은 고속도로에서 점멸되는 도시나 마을, 사적지 등을 일일이 소개했고, 승객의 불편을 덜어주는 서비스에 주력했다. 이 같은 안내양의 활약은 곧 다른 고속버스회사에도 확산됐지만 승객들은 그래도 그레이하운드에 많이 몰렸다.
또 서울∼전주간은 한진이 서울역전에서, 동양고속이 종로에서, 중앙· 광주·천일·한일·한남고속이 동대문 앞에서 매 40분 간격으로 출발했는데 요금은 850원이었다.
1970년 들어 교통신문도 성장에 성장을 거듭, 급기야 국내 전문지 사상 처음으로 주 2회 타블로이드 12면 발행시대를 연다. 이는 창간 3년7개월만인 70년 5월 22일의 일이다.
그 무렵 교통신보에 실린 시대상 한 토막.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간지 박스형 돌출 광고 내용을 보면 "대전서 온 유영순양(20세)을 찾습니다. 배지색 상의에 수박색 쓰봉을 입고 흑색 단화를 신은 유양은 지난 5월 3일 시내 서계동 부근에서 길을 잃고 행방불명 되었습니다"라고 알리고 있고 연락전화로 교통신보 중역실과 이△△씨 댁의 전화번호가 나란히 실려있었다.
가출한 자녀를 찾는 광고를 교통신보에 실을 만큼 당시 본지의 지명도가 높았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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