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교통신문40=<22>1968년 3월 '대한항공'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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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교통신문40=<22>1968년 3월 '대한항공' 탄생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07.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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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훈 사장 고심끝 대한항공 인수

JAL서 노하우 얻고 가능성 열어
박 대통령의 민영화 결단을 수용
숙연한 분위기속 '민항시대 개막'

대한항공과 일본항공은 우선 승무원의 훈련과 업무 숙달을 위해 KAL의 기장과 스튜어디스를 JAL에 탑승시키기로 했다.
즉 KAL은 자체항공기로 서울∼오사카, 부산∼후쿠오카선을 운항하고 JAL은 자체항공기로 도쿄∼서울 간을 운항하지만 이 노선에 KAL의 조종사 한 명과 여승무원 1명을 탑승시키게 했던 것이다. 모든 간행물마저도 KAL과 JAL의 명의를 동시에 기입, 밀접한 관계가 반영되도록 했다.
이렇게 노하우를 축적한 대한항공은 1967년 드디어 제트여객기 'DC-9'기 1대를 태극마크도 선명하게 단 늠름한 자태를 김포국제공항에 선보였다.
이 'DC-9' 제트 여객기는 서울∼오사카선은 물론 이해 8월14일에는 새로 개설된 서울∼타이페이∼홍콩 간 국제선에도 취항했다.
'DC-9'기의 도입으로 이날까지 우리 하늘을 누볐던 프로펠러식 비행기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바야흐로 '초음속 제트여객기시대'의 막을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DC-9'기는 운수 사납게도 취항 40일 만에 전기기기 부품 고장으로 오사카공항에 발이 묶이게 됐다. 제작회사인 더글러스회사에 연락해 7개월 후에 겨우 수리를 끝냈다.
63명의 승객과 9명의 승무원을 태운 채 폭발 직전에 비상착륙한 사고기는 비록 사상자는 생기지 않았지만 수리기간이 오래 걸렸고 공신력마저 여지없이 떨어져 결국 승객 중 20% 이상이 JAL이나 노스웨스트 로 옮겨가는 결과를 빚어내고 말았다.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DC-3' 2대, 'DC-4' 1대, 'F-27' 2대, 'FC-27' 2대,'코니' 1대 등 프로펠러기만 8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나마도 완전 자체보유기는 5대 뿐이었고 나머지는 빌려온 것이었다. 다른 항공사와 경쟁하기란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DC-9'기의 좌절 여파는 자못 컸었다.
따라서 대한항공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기체가 낡아 고장이 잦았고 연발착이 빈번해 공신력은 더없이 하락곡선을 그려갔다. 당시 크고 작은 20여개의 국영기업체 가운데에서도 두드러지게 적자 경영으로 고전하는 기업체가 대한항공공사였다.
결국 사장인 신유협이 물러나고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장성환씨 가 새로운 사장으로 취임, 적자 경영의 어려움을 넘기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장성환씨 의 대한항공공사 사장 취임은 사실 민영화를 전제로 한 경영쇄신에 있었다.
1967년 10월 20일 대한항공공사가 민영화되기까지 1년 4개월 동안 장사장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과감하고 결단성 있는 그의 경영방침은 마침내 불신 국영업체의 표본 같았던 대한항공공사를 정상 궤도로 끌어 올려 민영화에의 길을 밝게 했다.
이무렵 우리나라는 제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2차 5개년 계획을 추진 중에 있었다. 적지 않은 민간 자본이 형성되는 시기였으므로 막대한 자본이 드는 항공 사업을 감당할 민간 기업의 저력도 축적됐다고 볼 수 있었다.
정부는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민영화시키기로 방침을 굳히고 1968년 6월부터 8월까지 이 공사를 인수할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재계의 몇몇 유력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나 거의가 한국민간항공의 장래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만 피력할 뿐이었다.
결국 정부는 대한항공공사를 공매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도 용이하지가 않았다. 두 번에 걸쳐 공매에 붙였으나 모두 유찰되고 말았다.
그래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9월 중순경 조중훈 씨를 청와대로 불러 간곡히 당부했다.
"조 사장! 대한항공을 국력의 상징으로 발전시켜 주시오. 적임자는 당신뿐이오"
조중훈 씨는 박 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당시 조 씨는 월남사업의 종결과 함께 해운사업에 뜻을 두고 이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이미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렇다고 육·해·공에 걸친 입체적 운수사업의 꿈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 무렵의 조중훈 씨라고 하면 누구나가 인정하는 한국기업사의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월남에서 용역사업을 통해 1억 5천만 달러라는 막대한 돈을 불과 5년 동안에 벌어들이는 '신화'를 창조했던 것이다.
다만 조 씨의 마스터플랜은 해운사업을 먼저 착수, 본 궤도에 올려놓은 다음에 한 때 실패했던 한국항공(Air Korea)을 재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당부로 조씨는 계획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육·해·공 삼위일체의 운송사업의 꿈을 본격적으로 실현해 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주변의 참모들은 "항공사업은 아직 이르다", "장래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의 태도를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었으나 조씨는 중역회의에서 드디어 그의 주장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조중훈씨는 대한항공공사 인수에 대한 반대론에 "이해타산부터 앞세우는 기업인의 기업관은 현대사회에서 통할 수 없는 전근대적인 기업윤리다"라고 말한 뒤 젊은 시절부터 꾸어왔던 꿈을 실현해 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면서 자신을 믿고 또한 믿어 달라고 설득했다. 회의장은 숙연한 공기마저 감돌았고 조사장의 결단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그의 뜻은 받아들여졌다. 조씨는 즉시 박 대통령에게 인수할 의사가 있음을 통보했다. 곧 정부 당국과 인수교섭에 들어갔으며 정부는 대한항공공사를 15억원에 불하키로 하고 불하금의 변제방법을 5년 거치 10년 상환으로 결정했다.
한편 대한항공공사의 임원들이 일괄사표를 제출하자 박 대통령은 공사법에 따라 사장에 조중훈, 부사장에 조중건씨를 임명하고 순조롭게 민영화로 출범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1969년 3월 6일 김포국제공항에서는 많은 내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한항공공사 인수식이 정식으로 거행되었고 대한항공(KAL)은 실질적인 민영항공사로 역자적인 거보를 내디뎠다.
조 사장은 대한항공의 이미지 쇄신책의 일환으로 마크를 포함한 항공기 외부디자인의 변경을 선전과에 지시했다.
선전과에서는 여러 도안을 작성해 중역들로 구성된 품평회에 제출했으나 신통치 않다는 결론이 내려져 1969년 7월 주요 일간지를 통해 마크를 현상모집키로 했다. 그러나 결과는 가작 한편이 나왔을 뿐 신통치가 않았다. 그래서 조 사장은 몸소 마크의 기본을 작성까지 해 오늘날의 심볼이 탄생했던 것이다.
조사장이 만들어낸 기본안의 의미는 다섯 가지가 포함돼 있다고 한다.
① 중앙의 고니(백조)는 심오한 뜻을 간직해 원대한 희망과 강인하고 힘찬 날개를 가진 거대하고 굳센 하늘의 왕자로서 곧 대한항공사를 상징한다
② 외부의 원형은 무한의 연속, 즉 무궁한 발전을 뜻하며 지구의 형체로서 전 세계를 상징한다.
③ 힘찬 날개와 전 세계라는 조화로서 태극상을 형성해 전 세계를 태극의 날개로 제패함을 상징한다.
④ KAL의 자형은 영문상호 '코리언 에어 라인'(Korean Air Line)의 첫 자를 딴 약자로, 간결하면서도 강하게 대한항공의 인상을 강조코자 표기한 것이다.
⑤ 색상을 빨간색으로 표현한 것은 열의와 정력, 의욕과 투지, 그리고 왕성한 혈기와 정열 등의 의미로 시각적, 기술적인 효과를 고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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