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귀부인의 남자 ‘치치스베오’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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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귀부인의 남자 ‘치치스베오’를 아십니까?
  • 노정명 기자 njm@gyotongn.com
  • 승인 2018.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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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비조키 지음/ 임동현 옮김
 

귀부인의 남자 ‘치치스베오’.

‘18세기 이탈리아 귀족계층의 성과 사랑, 그리고 여성’이라는 부제로 출간된 이 책은 유럽 귀족문화를 아는 사람들에게도 묘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치치스베오’가 뭐지? 책 제목과 부제로 봐서는 흔한 유럽귀족 계급의 화려한 사교생활과 성문화에 대한 고찰 정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게 한다.

‘치치스베오’는 계몽주의와 시민사회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예법이 확산되던 18세기, 이탈리아의 귀족 계급에 존재한 독특한 관습 혹은 현상이다. 이 특이한 ‘사회적 페르소나’는 대개 연하의 귀족청년에게 맡겨지는데, 그는 자신이 시중드는 귀부인의 집에서 환담과 오락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며, 그녀가 외출할 때는 항상 옆에서 보좌한다. 이 관습을 지극히 이탈리아식으로 만드는 요소는 그의 존재가 귀부인의 남편이 공인하는 ‘공적’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많은 유럽 지식인까지도 의아해했던 이 흥미로운 현상은 언제, 어떻게, 왜 만들어졌으며, 한 세기 만에 사라져버린 이유는 또 무엇일까? 이 책은 다양한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이러한 의문을 이야기식으로 풀어낸다.

저자는 당대의 방대한 1차 사료를 검토해 역사 속 실제 치치스베오의 모습을 재구성한다. 실제로 귀부인과 치치스베오 사이에서 오갔던 편지나 일기 등을 주된 사료로 활용하지만, 그림을 비롯해 수많은 희곡과 소설과 회고록 등 문학작품, 여행자의 기록, 카페 주인이 남긴 목록, 소송 기록 당사자 간에 주고받은 편지 등 흥미로운 사료들도 많이 등장한다.

저자는 치치스베오를 근대 이탈리아의 귀족 문화를 들여다보는 창으로 활용한다. 치치스베오가 남편을 대체하던 혹은 남편과 협력하던 새로운 유형의 동반자가 된 까닭은 앙시앵 레짐 시기의 귀족 사회에서 이뤄졌던 그들의 결혼 및 상속 관습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 책에는 이렇게 치치스베오와 관련돼 있는 유럽의 여러 문화 현상들, 즉 계몽주의, 귀족 계층의 유산 상속 문제, 가족 윤리, 성 풍속, 그랜드 투어 등이 함께 다뤄진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치치스베오’의 발생과 소멸이 무엇보다 여성에 대한 관념의 변화, 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는 결국 남성에 의해 부과된 틀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18세기 이탈리아 귀족 사회에 폭넓게 확산되던 사교 문화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었다. 유럽 지배 계급의 새로운 문화를 상징하는 갈랑트리(여성에 대한 예의를 강조하고 여성의 환심을 사려는 태도)가 무르익어간 것이다. 갈랑트리와 자유연애가 성행하는 이 새로운 만남의 장에서 여성들의 곁을 지켰던 연하의 남성 귀족이 바로 치치스베오였다. 치치스베오는 한편으로는 여성들에게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 바깥의 영역에서 여성의 부정(不貞)을 통제하는 감시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치치스베오의 관습은 루소의 사상에 기초한 새로운 가족 윤리의 등장과 함께 한 세기만에 소멸의 길로 들어선다. 프랑스 혁명기의 금욕적인 부르주아 윤리가 이탈리아에 전파되면서 치치스베오의 활동 무대인 사교의 장을 근절되어야 할 악덕의 온상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19세기 민족주의의 등장과 함께 완전한 종말을 맞는다.

18세기 이탈리아의 귀족계급의 ‘사회적 페르소나’인 ‘치치스베오’의 탄생과 소멸을 따라가다보면, 폐쇄적인 제도와 남성에 갇힌 여성의 역사적 궤적도 함께 보인다.

 

저자인 로베르토 비조키(Roberto Bizzocchi)는 이탈리아 피사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1981년 피사 고등사범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 르네상스 연구센터와 런던 바르부르크 연구소 그리고 우디네 대학교를 거쳤다. 교회제도사와 지성사, 문화사 그리고 여성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믿을 수 없는 족보》, 《가족 안에서: 근대 이탈리아의 매력과 애정의 역사》, 《근대사 연구 입문》, 《근대 이탈리아의 성직 계층》, 《15세기 토스카나의 교회와 권력》, 《이탈리아 도서관과 왕정복고 시기의 문화》, 《마키아벨리의 독자 구이차르디니》 등이 있다.

역자인 임동현씨는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인천대학교, 아주대학교, 신한대학교에서 서양근대사와 이탈리아사를 강의하고 있다. 2016년 이탈리아 피사 대학교에서 잠바티스타 비코의 보편사 서술에 관한 연구로 역사학 분야 국가연구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관심 분야는 근대 유럽의 지성사와 종교사, 여성사, 계몽주의, 비코 연구 등이다. 주요 저서로는 《이탈리아역사 다이제스트 100》, 대표 논문으로는 〈Vico and the disgregation of historia salutis〉,〈비코의 자기검열〉, 〈유럽의식의 위기와 비코의 로마사 서술〉,〈피에트로 베리와 계몽주의 여성관〉, 〈근대 자연법사상의 대두와 가톨릭 세계의 저항〉 등이 있다.

▲출판사: 서해문집(www.booksea.com)
▲페이지 수: 544페이지
▲가격: 2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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