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묘비입법(墓碑立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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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묘비입법(墓碑立法)
  • 유희근 기자 sempre@gyotongn.com
  • 승인 2019.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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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신문 유희근 기자] 묘비입법(墓碑立法·tombstone legislation)’이라는 말이 있다. 안타까운 사고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의 사연이 언론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면서 재발 방지를 위한 법 제정 및 개정 등의 입법 추진 과정에서 숨진 피해자의 이름이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를 말한다. 보통 언론 등에서 법률안의 정식 명칭 대신 피해자의 이름을 붙여 ‘○○○법’으로 쓰는 식이다.

지난해 9월 부산에서 발생한 음주운전 사고로 ‘윤창호법’이 제정된 것이 대표적인 묘비입법 사례다. 고인의 가족과 친구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제정된 윤창호법은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가법)과 도로교통법 개정을 이끌어 냈다.

특가법 개정으로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사망하게 한 경우 기존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서 '무기징역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으로 법정형이 상향됐고, 도로교통법 개정으로 가중처벌 기준이 기존 3회 이상에서 2회 이상으로 강화되는 등 음주운전 처벌 기준과 형량이 전체적으로 강화됐다.

특히 1962년 제정된 이후 계속 유지돼 온 음주 운전 적발 혈중 알코올농도가 0.05%에서 0.03%로 상향된 점은 묘비입법의 위력을 잘 드러낸다.

이 외에도 지난해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근무하던 김용균씨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숨진 사고를 계기로 ‘김용균법’이라는 이름으로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된 것도 대표적인 묘비입법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묘비입법 사례가 또 등장했다. 지난 5월 인천 송도에서 발생한 ‘유소년 축구클럽 사고’로 숨진 아이들의 이름(‘태호·유찬이법’)으로 '도로교통법'과 '체육시설의 설치·이용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된 것이다.

태호·유찬이법이 국회를 통과하면 숨진 아이들이 다녔던 축구센터 등 어린이 스포츠클럽이 그동안 현행법상 ‘체육시설업’에 포함되지 않아 어린이 통학버스에 관한 안전 규정의 사각지대 놓여있었던 문제가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태호·유찬이법은 어린이 통학 안전에 있어 최소한의 제도적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사고 당시 주변 차량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을 보면, 어린이를 태운 승합차량은 시속 30㎞ 제한속도 도로에서 시속 85㎞로 과속을 하다 승합차와 신호등 기둥을 잇따라 들이받고 멈춰섰다. 아무리 법이 바뀌더라도 운전대를 잡고 있는 운전자의 안전 의식이 달라지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송도 유소년 축구클럽 사고 당시 이를 다룬 기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내용 중 하나는 '아이들이 다닌 축구클럽이 ‘세림이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사고가 났다'는 것이었다. 태호·유찬이법이 바로 그 문제를 해소하는 입법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어린이 통학용 차량에 보호자 동승을 의무화한 세림이법도 지난 2013년 발생한 사고로 만들어진 묘비입법이다. 묘비입법의 사각지대를 메꾸는데 또 다른 묘비입법이 세워진 셈이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안전을 얻는데 안타까운 희생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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