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국 박사의 모빌리티 르네상스] 도로의 주인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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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국 박사의 모빌리티 르네상스] 도로의 주인은 사람이다
  • 교통신문 webmaster@gyotongn.com
  • 승인 202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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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브루셀은 중세시대의 건축물이 잘 보존돼있는 그랑플라스(광장)로 유명하다. 그 광장을 크게 둘러싼 5각형의 순환도로 내부에 많은 도로들이 존재하는데 보행자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일방통행 처리되거나 시간제로 자동차 통행이 허용되는 곳이 많다. 이렇게 보행자 친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브루셀 출장을 가서 놀라운 도시의 개혁을 목격했다. 광장에서 가까운 4차로 도로인 안스파흐(Anspach) 대로라는 곳이 간선도로임에도 불구하고 보행자 전용 도로로 지정돼 있었다.

안스파흐 대로는 브루셀 도심에서 가장 넓은 도로이다. 그만큼 차량의 통행도 많았을 것이다. 시 당국은 2012년 이 도로를 보행자 전용으로 지정하고 관련 시설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운전자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약속은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이러한 시의 약속 불이행에 대한 시민들의 대응은 재미있게도 소풍이다. “안스파흐로 소풍갑시다” 라는 운동이 일요일마다 행해져서 시민들이 가족과 친구를 데리고 안스파흐 대로 한가운데 모여 소풍을 즐긴 것이다. 물론 이것은 소풍이 아니고 자동차 통행을 막기 위한 시위였지만 즐거운 소풍의 형식으로 시민들이 시 당국에 항의한 것이다. 결국 시 당국은 2021년 보행자 전용으로 안스파흐 대로를 지정했다.

브루셀 주민들에게 “도로의 주인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사람이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것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도로의 주인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아마도 “자동차 아닌가요?”라고 반문할 것 같다.

우리나라의 교통 인프라의 중심은 도로이다. 여객 통행의 70%, 화물 통행의 90%가 도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역대 정부는 자동차 산업을 국가 경쟁력의 근간으로 삼고 적극 육성했으며 자동차가 달릴 도로를 신설하고 확장하는데 많은 재원을 투자했다. 우리나라 도로의 품질은 선진국과 비교해서도 뒤지지 않는다. 전국 거의 모든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망과 대도시와 그 주변 도시를 잇는 광역도로망을 갖추고 있다. 도로의 포장 상태 또한 주기적 유지관리로 적정한 상태를 유지한다. 폭우 또는 지하 공사로 싱크홀이 발생하면 모든 국민의 관심사가 된다. 그만큼 평소 도로가 잘 관리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유럽, 미국 등 선진국에는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가 종종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도로가 교차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신호등이 설치돼 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 도로에 대한 높은 평가는 자동차 운전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다. 도로의 주요한 이용자인 보도를 걷고 길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도로는 그리 녹록한 곳이 아니다. 도로를 설계하고 시공할 때 도로법의 하위에 있는 도로의 구조·시설 기준에 관한 규칙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이 규칙은 자동차의 종류별 표준 크기를 제시해 도로의 시설 기준이 자동차의 크기에 맞도록 규정한다. 가장 큰 자동차인 세미트레일러의 폭은 2.5m이다. 규정된 최소 차로폭은 2.75m이며 0.75m의 길어깨 공간이 있으므로 2차로 도로에서 세미트레일러가 서로 마주쳐도 수월하게 지나갈 수 있다.

자동차 통행 위주의 세세한 도로 설계 규정을 제공하는 위의 규칙은 보도를 이용하는 사람, 유모차, 휠체어 등의 크기와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보도 최소폭 1.5m 규정과 최대 횡단경사 4% 규정이 그나마 보도에 대한 배려의 전부이다. 우리나라의 도로 설치 관행은 차도폭을 최대한 확보한 후 남는 공간에 보도를 둔다. 따라서 최소폭으로 시공된 보도가 흔히 보인다. 규칙에는 없지만 건축가들이 참고하는 설계서 등에서 유모차나 휠체어의 폭을 0.75m로 보고 이들이 교행 가능하기 위한 설계 기준 폭으로 1.0m 정도를 권장하고 있다. 따라서 휠체어가 1.5m 폭의 보도에서 마주치면 지나갈 수 없다. 그나마 그 좁은 공간에 가로수가 심어져 있고 상가 광고물이 서 있을 때는 휠체어는 물론 걷는 이들도 지나가기 어렵다. 우리나라 건물주들은 홍수 시 건물로 빗물이 범람해 들어오는 것을 염려해 건물 바닥 높이를 최대한 높이기를 원한다. 이렇게 지어진 건물의 1층 바닥 높이는 도로의 높이와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규정된 4%를 크게 초과한 기울기로 시공된 보도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급경사는 노인과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큰 불편을 준다.

도로의 폭과 기울기 뿐만 아니라 교통신호도 사람보다 자동차가 더 배려 받는다. 교통량이 많은 러시아워 시간대에는 교차로 각 방향 녹색신호 시간을 길게 설정해야 하고 전체 신호 주기도 길어진다. 따라서 러시아워일 때 걷는 이들은 평소보다 더 기다려야 보행자 녹색신호를 받을 수 있다. 차가 막히지 않는 시간대에 이러한 불편을 주는 것은 비상식적이므로 교통 선진국에서는 오전 출근시간대, 오후 퇴근시간대, 그 외 시간대 등으로 나누어 교통량이 적은 시간대에는 더 짧은 주기로 운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몇 개의 시간대로 나누어 교통 신호를 운영하는 사례는 서울과 같은 대도시의 주요 교차로를 제외하고 발견하기 어렵다. 대부분 우리 주변 교차로에서는 러시아워를 가정해 신호시간을 운영한다.

보행자 녹색신호는 러시아워에 따라 길어지지 않는다. 도로폭을 보행 속도로 나눈 값에 수초를 추가한 값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직진 차량의 녹색신호시간은 같은 방향의 도로 횡단 보행자 녹색신호시간보다 길다. 같은 방향의 서로 방해하지 않는 교통류임에도 보행자에게 더 짧은 시간을 주는 것이다. 이유는 우회전 자동차의 편의를 위해서이다. 보행자도 교차로를 이용하는 주체인데 신호 시간 설정에 반영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도로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아직은 자동차이다”라는 대답이 정답이다. 다행히도 최근 몇 년간 보행자를 배려하는 사람 중심 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도시부 제한속도 감소, 우회전 일시정지, 이면도로 보행자 우선 규정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 규정이 발표될 때마다 자동차 통행을 방해한다는 반대 여론이 형성된다. 법 개정의 배경이 되는 도로의 주인이 사람이라는 인식이 시민, 전문가, 공무원들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4차로 도로를 자동차로부터 되찾아온 브루셀 시민들의 철학이 우리들에게도 당연시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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