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동남단 갈맷길 “영도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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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동남단 갈맷길 “영도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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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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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여의주'…“영도를 알면 부산이 보인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영도다리엔 한국전쟁 흔적

국토의 동남쪽 끝 부산에는 풍광 좋은 걷기 길이 있다. 부산 갈맷길 700리이다.
갈맷길은 9개 코스, 23구간, 278.8㎞이다. 바닷가 길, 숲길, 강변 길, 도심 길로 이어지면서 부산만의 매력과 낭만을 느끼게 한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도시 문화, 항구의 역동, 시원하게 펼쳐지는 푸른 바다, 짙은 숲, 유장한 낙동강 하구가 어우러지면서 빚는 다채로움은 부산이 아니면 맛보기 어렵다.

◇부산 갈맷길 700리 : 갈맷길은 갈매기와 길의 합성어이다. 1980년대 대중가요 '부산 갈매기'가 인기몰이를 한 뒤로 갈매기는 부산 사람을 상징하는 새가 됐다. 끼룩끼룩 우는 갈매기는 갈맷길의 동반자이다.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이기대 해안산책로를 지나 오륙도 스카이워크까지 이어지는 2-2구간, 아름다운 일몰로 유명한 다대포해수욕장 몰운대에서 동양 최대의 철새 도래지인 을숙도까지 약 8㎞를 낙동강 하구의 정취에 젖어 걸을 수 있는 4-3구간, 편백 숲이 울창한 성지곡수원지를 끼고 있는 6-3구간이 갈맷길 명소로 꼽힌다.
이 명소 반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절영해안산책로가 포함된 3-3구간이다. 이기대 길과 함께 부산 명품 길을 대표한다.
갈맷길 3-3구간은 남항대교에서 시작해 흰여울문화마을∼절영해안산책로∼중리해변∼영도해녀문화전시관∼감지해변산책로∼태종대∼동삼동패총전시관∼국립해양박물관을 거쳐 아미르 공원에서 끝난다. 길이는 약 15㎞, 5시간 정도 걸린다.
◇영도대교 기점으로 남북항 갈려 : 영도는 부산의 '여의주' 같은 곳이다. 부산 남쪽에 위치해 자연 방파제 구실을 하는 영도가 있기 때문에 부산항이 발달할 수 있었다. 영도대교를 기점으로 북쪽 항구는 북항, 남쪽은 남항이라 불린다. 컨테이너 전용 부두인 북항은 우람한 크레인이 즐비하다.
영도는 봉래산이라는 큰 산이 중심에 있는 섬으로, 섬 하나가 기초자치단체인 구를 형성한다. 인구는 16만 명 정도. 웬만한 시보다 많다. 면적은 약 14㎢.
맑은 날 태종대, 절영해안산책로에 서면 일본 쓰시마(대마도)가 보인다. 영도와 쓰시마 사이 거리는 50㎞ 정도. 일제 강점기 부산과 영도는 일본의 대륙 진출 전초 기지가 됐다.
이 과정에서 영도에는 도기 산업, 근대 조선소, 제염업, 수산업 등이 발달했으며 극장, 시장, 전차, 수산시험장, 금융신탁업 등이 개설됐다.

 

1934년 개통된 영도대교는 한국에서 최초로 육지와 섬을 연결한 다리였다.
선박이 지나갈 때 다리 한쪽 끝이 들어 올려지는 도개교인 이 다리의 개통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6만여 명이 모여들었다. 당시 부산 인구가 16만여 명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영도다리가 얼마나 이목을 끌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도다리는 한국전쟁 때도 중요한 랜드마크였다.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무작정 부산으로 향하던 피란민들은 어쩌다 헤어지게 되면 영도다리 밑에서 만나자고 미리 약속해 두었다.
영도다리는 만남의 광장이었고 주위 벽면은 헤어진 가족을 애타게 찾는 메모로 빼곡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로 시작하는 현인(1919∼2002)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는 1·4후퇴 때 헤어진 금순이를 영도다리에서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흰여울과 절영도 : 갈맷길 3-3구간의 인기 장소인 흰여울문화마을도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형성했던 마을이다.
마을 위 봉래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눈처럼 하얗다고 해서 흰여울이라 불린 이 마을은 이제 광안리, 해운대 다음으로 관광객이 많고, 아기자기한 카페와 소품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 위로는 한국에서 가장 풍광이 아름다운 도로 중 하나인 절영로가 지나고, 아래로는 명품 산책길인 절영해안산책로가 나 있다. 기암괴석이 빚어낸 해안 경관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푸른 하늘과 바다를 두 눈과 가슴 가득 채우고 걸을 수 있는 길들이다.
절영로에는 맑은 날 대마도를 관찰할 수 있는 하늘전망대, 1975년에 지어진 75광장이 탁 트인 조망과 쉼터를 선사한다.
중리해변에 있는 영도해녀문화전시관에서는 영도 해녀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전시관 1층은 해녀들이 직접 잡은 해산물 판매 매장이다.
◇돌아오지 못한 유격대원들 : 태종대는 영도의 유구한 역사를 거듭 환기한다. 태종대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한다.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이곳 절경에 취해 활을 쏘며 즐긴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하나이고, 1419년 조선에 큰 가뭄이 들자 태종 임금이 이곳을 찾아 기우제를 지낸 뒤 비가 내린 데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종대는 북파 영도유격대의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영도유격대는 1950년 말 창설된 비정규부대이다. 1·4후퇴 때 북한 함경남북도, 강원도 북부에서 탈출한 청년 1200여 명의 자진 입대로 구성됐으며 태종대 일원에서 훈련받았다.
이 중 900여 명이 북한에 침투해 철도 폭파, 후방 교란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휴전으로 900여 명 중 생환한 대원은 33명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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