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 & 교통신문 40=<3>1968년 교통시보로 제호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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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 & 교통신문 40=<3>1968년 교통시보로 제호변경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0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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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진두지휘 속 고속도로 건설 본궤도에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 열정적 참여
캐딜락 등 외제차 고위층에 인기
운수시보, 교통시보로 제호 변경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의 정확한 착공날짜는 알 수가 없다.
공식적인 기공일자는 68년 2월 1일이었지만 서울∼오산 간 공사는 그보다도 훨씬 앞서 착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기의 공사는 설계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공사를 진행하면서 설계와 병행했던 것이다.
전장 428㎞의 경부고속도로를 단기간 내에 완성하기 위해서는 전체노선을 몇 토막으로 잘라 각 공구별로 일제히 공사를 벌여야만 했다. 그래서 공사의 착공은 4개 구간으로 나뉘어졌다.
이 때 현대건설은 사운을 걸고 악전고투를 감행하고 있었다. 현대건설 정주영 사장이 공사에 임하는 자세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정 사장은 '수원공구에서는 이득을 계산하지 않는다'고 공언했는데 아마도 이것이 정 사장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는 현장에서 군용 야전침대를 펴고 잠을 자며 공사를 독려했다. 대부분의 참여회사의 최고경영자들이 모두 비슷한 자세로 공사해 임했지만 정 사장의 열의는 더욱 두드러졌다.
68년 12월 22일 경부고속도로의 서울∼수원간이 개통된 이 날 서울∼인천 간을 연결하는 경인고속도로도 동시에 완전 개통되었다.
68년 3월 24일 기공한 경인고속도로는 38억 5천만 원을 들인 전장 29.5㎞로서 노폭이 24.4m인 4차로에 4개소의 인터체인지와 전천후시설을 갖췄으며 도로는 89년 12월 20일까지 일단 20년 동안 한국도로공사가 통행료를 징수, 관리하도록 했다. 경인간에는 당시 한진과 삼화교통이 최신형 고속버스를 투입, 운행했다.
'뻗어가는 고속도로 삼천리는 이웃된다' 당시의 신문들은 앞 다퉈 큼직큼직한 활자로 보도했다.
박정희 대통령내외는 68년 12월 22일 오전 10시 서울∼인천 간 고속도로 입구에서 첫 테이프를 끊고 단숨에 가좌인터체인지까지 시주한 후 그 곳에서 또 테이프를 끊어 경인고속도로를 개통시켰다.
여기서 경부고속도로의 개요를 살펴보자. 전장 428㎞, 폭 22.4m의 4차로이며 표층은 2.5㎝로 두께 7.5㎝였다. 소요된 공사비는 429억 7300만 원, 연인원 892만 8000명이 동원됐고, 투입장비 연 165만대, 그리고 숨진 산업전사가 77명이었다.
68년 한 해 정부의 증차계획은 1만대 수준이었는데 11월에 현대가 포드를 조립해 내면서 목표달성은 무난했다.
이 해 9월 9일부터 10월 20일까지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가 서울 구로공단에서 열렸는데 특히 신진, 현대, 아시아, 기아등 국내 4대 자동차메이커를 비롯하여 스칸디나비아 등 세계 각국의 유명 자동차메이커들이 전시관을 세워 한국 최초의 자동차박람회를 방불케 했다.
이른바 '하면 된다'라는 이념을 낳은 경부고속도로가 마침내 개통됨으로써 경제개발, 지역개발에 미친 효과는 심대했다.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지 않았다면 울산·포항의 양대 공업기지가 오늘날의 성황을 구가할 수 없었을 것이고, 구미·여천·창원·광양 등지의 공업단지가 조성되지도 못 했을 것이다.
1968년도는 유난히도 교통사고가 급증했다. 그만큼 차량은 늘어났는데 도로율이 뒤따르지 못했고 일반시민들의 교통질서의식도 낮았다.
이 해 10월 현재 교통사고는 이미 2만 건이 넘어서고 있었으며, 사망자가 1900 명이나 발생, 사상최고를 기록했던 것이다. 그래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는 보상관계로 자주 분쟁이 일어났다. 당시에도 한국자동차보험공제회사가 있었고 '책임보험'이라는 강제보험제도가 있기는 했으나 운수업자들의 기피와 국민들의 인식부족으로 사실상 인명보상 문제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몇 몇 인사들이 뜻을 모아 68년 11월 1일 공제 회사를 '한국자동차보험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사장에 강성태, 부사장에 김원래, 전무이사에 강병각, 상무이사에 김병각, 신경수, 송기윤, 송재도 등 임명돼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그 후부터 운수업자의 호응과 자가용소유자들의 자발적 가입이 늘어 점차 경영상 기틀을 잡아갔다.
이 무렵 '하늘을 나는 궁전'이라는 점보제트여객기(보잉747)가 첫선을 보였다. 이 여객기는 무게가 350t에 달하고 객실의 길이가 55m, 좌석 수는 490석이나 됐다.
'단군 이래 호경기'라고 할 만큼 국내경제가 호전돼갈 무렵의 1968년에는 고급승용차도 부쩍 늘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서울 거리를 누비고 있는 자가용 중에서 누구의 차가 제일 좋고 제일 값이 나가느냐에 대한 화제가 심심치 않게 꽃을 피우곤 했다.
당시 국내의 고급차로는 캐딜락, 벤츠, 링컨 등이 있었는데 특히 캐딜락을 최고급으로 쳤다. 당시만해도 고급차는 탑승자의 신분의 상징처럼 평가됐다. 서울 서린동의 고급승용차매매브로커들 얘기로는 랭킹 1위는 캐딜락 68년형 이라고 했다.
이것을 당시 이효상 국회의장과 삼환기업의 최종환 사장이 탔다. 또 벤츠는 삼성재벌의 이병철씨, 한진의 조중훈씨, 문종건 조흥은행장, 대한극장의 국쾌남 사장 등 애용했고 김종필씨는 벤츠250, 정일권 국무총리의 승용차는 캐딜락 67년형이었으며, 또 같은 형의 자동차를 한국생사의 김지태 사장, 대항양회의 이정림 사장, 현대건설의 정주영 사장, 대성산업의 조영일 사장이 즐겨탔다. 그리고 링컨은 삼호무역대표인 정재호씨와 선경물산의 최종건 사장이 갖고 있었다.
당시 연예계에서는 고은아씨가 타고 다니던 벤츠 61형이 제일 좋은 것으로 알려졌고 윤정희씨 오스틴 62년형, 김지미·최무룡씨 부부는 2대의 크라운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가수 최희준씨가 크라운을, 영화배우 김진규씨가 닷지, 또 신영균씨가 크라운을 각각 탔다.
고급승용차의 구입루트는 그 당시 두 갈래가 있었다. 하나는 직접 수입하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주한외교관들의 차를 불하받는 경우였다. 다만 수입할 경우는 당시 수입실적 200만 달러에 대해 승용차쿼터 1대씩을 줬기 때문에 무역상에 부탁해야 했다.
1968년 12월 말 전국의 자동차등록대수는 모두 8만 951대로 1년 동안 2만 254대가 증가했다. 이 중 승용차가 3만 3112대로 가장 많았고, 합승 2267대, 버스 1만 519대, 화물 3만 1582대, 소형차 810대, 특수차 1283대 등이 있다. 이 해 자동차생산실적은 승용차 1만 1238대, 버스 119대, 화물차 5579대로 모두 1만 7736대였다.
이 무렵 교통신문은 1월 13일자로 정호진 발행인 체제에서 박성렬 발행인 겸 편집인 체제로 전환, 본격적인 교통전문언론의 길을 모색한다.
이 해 10월 22일 창간 2주년에 즈음한 10월 28일자로 교통신문 창간 당시의 제호인 '운수시보'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대신 '교통시보'로 제호를 변경, 바야흐로 제2의 창간을 맞게 된다.
창간 2주년 기념특집호는 당시로써는 드물게 타블로이드 1면 전면을 컬러로 제작했는데 전면사진으로는 경부선 열차가 강변을 달리는 장면을 실었는데 하단에는 이훈섭 당시 철도청장 명의의 붓글씨로 된 창간 2주년 축하광고가 실려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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