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40&교통신문40=<33>타이어업계의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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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40&교통신문40=<33>타이어업계의 성장기
  • 박종욱 Pjw2cj@gyotongn.com
  • 승인 200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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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타이어 60∼70년대 승승장구

한국타이어와 더불어 2대 축 구축
89년 비로소 교환용이 신차용 앞서
흥아 탈락…특수분야로 방향 전환

우리나라 타이어산업은 1950년대 중반까지는 국내수요를 재생타이어로 충당했지만 1956년 흥아타이어 설립을 계기로 같은 해에 한국타이어제조 및 동신화학이 새 타이어메이커로 등장했고 1961년도에는 삼양타이어가 광주에 설립되면서 타이어생산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내수시장 충족은 물론 1962년부터는 극소수이긴 하지만 동남아지역으로 수출까지 기록하게 됐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국내타이어업계는 협소한 내수시장 수요에 비해 과잉시설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업체간 과당경쟁이 불꽃을 튀겼다.
한국타이어는 1968년 2월 상호변경과 함께 효성그룹의 일원이 됐고 공개법인으로 주식을 상장함으로써 도약을 위한 본격제조에 들어갔다.
특히 한국타이어는 품질향상에 주력했다. 그 결과 타이어업계 최초로 1963년 전제품이 KS표시 허가공장으로 지정됐고 1972년엔 미국 교통성의 표준규격에 합격해 해외시장에서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또한 1973년 일본 요코하마고부(주)와 기술제휴를 맺고 끊임없는 혁신의 길을 달렸다. 임원진과 전종업원은 '우리의 산업은 우리의 손으로'라는 기치아래 장인정신으로 똘똘 뭉치기 시작, 기술축적 품질향상 신뢰창출에 골몰했다.
이들의 땀과 의지의 결합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열매를 맺어갔다. 우선 해외시장에서도 고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기에 이르러 1972년 수출의 날에 국무총리상을 수상했고, 1974년에는 산업포장상, 1975년에는 동탑산업훈장, 1980년에는 1억불 탑을 수상하는 등 타이어산업의 선두주자로 올라섰다.
생산 면에 있어서도 계속 증가되는 수출량과 국내수요 충족을 위해 대전에 세계수준의 래디얼타이어 전문생상공장을 설립, 1979년 1차 공사를 완공한 이래 계속해서 생산설비를 늘려 나갔다.
이와 함께 해외시장 개척에도 주력, 1990년대 이후 전 세계 150개가 넘는 국가와 거래를 계속해오고 있다.
타이어문화는 자동차와 더불어 꽃피우기 마련이다. 재생타이어로부터 첫 걸음마를 한 우리나라 타이어공업은 1980년대에 들어와 자동차보유대수가 늘어나면서 고속주행용 래디알을 비롯해 스노타이어, 튜브레스타이어 등을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했고 특수분야에 속하는 항공기용 타이어까지 생산하고 있다.
불과 30여년 만에 이 같은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은 메이커 간 선의의 자유경쟁을 통한 기술축적 그리고 수출에 주력했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성장한 우리나라 타이어산업은 한국타이어를 필두로 금호타이어가 쌍벽을 이루고 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한국타이어, 흥아타이어, 삼양타이어가 경합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국내타이어업계는 협소한 내수시장 수요에 비해 과잉생산시설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업체 간 과당경쟁이 불가피해졌고 경영난이 초래돼 1개 업체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1개 업체가 흥아타이어였다.
흥아는 후일 원풍, 우성타이어로 사명을 바꾸어 명맥을 유지하다가, 미국의 미쉐린과 손을 잡고 고품격 타이어 생산의 기치 아래 미쉐린코리아라는 이름으로 특수타이어 제조사로 국내 생산에 참여하게 된다.
삼양타이어는 1960년에 설립돼 전남광산군 송정읍 황룡강가 10만 평 대지위에 제1, 제2공장이 체계적으로 설계되어 기술센터, 창고 등 여러 부속건물과 함께 단일공장으로는 세계 10대 공장의 하나로 꼽혔다. 임 ·직원들도 미래에 도전하는 진취적인 사고로 한 덩어리가 되어 기술축적·품질향상에 힘썼다.
승용차타이어로부터 항공기타이어에 이르기까지 각종제품의 개발·생산을 컴퓨터로 처리하고 초현대식 시설을 바탕으로 연구와 꾸준한 교육으로 품질관리에 주력, 그 우수성을 자랑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삼양은 전국 100여 개 대리점을 정기적으로 순회하면서 품질조사와 애프터서비스를 하는 열성을 보였다.
삼양은 또한 공해의 미연방지, 숲을 만들기 위한 공장녹화와 후생복지를 위한 혼신의 노력을 다해 노사협조의 풍요로움을 가꾸어 나가기도 했다.
1984년 8월 주식회사 금호로 상호를 변경한 후부터는 더욱 사세는 신장돼 갔다. 미국 유니로얄·홀딩회사와 타이어에 대한 기술·AS계약을 맺고 더욱 품질향상에 박차를 가했다.
광주공장과 곡성공장의 첨단설비가 만들어내는 금호타이어는 현재 세계적인 타이어메이커로써의 성가를 자랑하는 수준까지 와 있다.
국내 자동차경기의 점진적인 상승과 세계적인 타이어수요 증가에 힘입어 타이어판매량은 매년 지속적으로 신장했고 특히 1977년∼1987년 사이의 연 평균 증가율은 15.7%를 나타냈다.
그러나 1989년에는 노사분규로 수출은 전년대비 3.0%감소함으로써 대중화 단계에 들어선 자동차 붐에도 불구하고 전체 타이어판매량은 1988년 증가율 23%에 훨씬 못 미치는 4.7% 증가에 그쳤다.
이것은 제2차 석유파동 때 수출이 전년대비 14.8%나 감소했던 1982년 이후 최초로 저조한 기록이었다.
한국타이어업계는 국내 자동차경기와 함께 세계적인 타이어수요증가에 힘입어 판매량은 해마다 상승곡선을 그려왔으나 1989년 노사분규에 따른 생산차질로 공급물량이 순조롭지 못해 수출이 감소하기는 했지만 1990년에는 다소 회복의 기미를 보였다.
이것은 자동차의 내수가 호황을 보인데도 원인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생산물량이 공급을 충족하지 못했다. 1989년 1·4분기 초에 원자재공급업체인 고려강선주식회사의 노사분규로 스틸코드 공급량이 격감한데다가 일부 타이어제조업체의 노사분규장기화 및 공장의 수해로 정상조업이 이루어지지 못한데 원인이 있었다.
타이어판매는 신차용과 교환용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1989년에 판매된 신차용 타이어는 454만1000여개로 전년대비 38.4% 증가했다. 반면 교환용타이어는 1989년 자동차 보유대수 증가에 힘입어 전년 대비 8.5%가 증가한 528만2000여개가 판매돼 처음으로 교환용타이어 단일품목의 판매량이 500만개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아무튼 1980년대는 우리나라 타이어산업이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지속해 자동차산업과 함께 제조업의 신화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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