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택배 수탁업자의 추운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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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택배 수탁업자의 추운 겨울
  • 교통신문 webmaster@gyotongn.com
  • 승인 2005.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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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수탁업 다시는 안 할 겁니다"
본인 모르게 관할구역에 영업소 세워
본사와의 불평등 계약이 요인


서울 독산동에 살고 있는 허상권(가명, 35세)씨는 을유년 새해가 외롭고 힘들기만 하다. 예년에는 새벽공기를 마시고 나가 밤 10시가 다 되도록 부지런히 택배박스를 나르고 있었지만, 택배업을 그만둔 현재는 무료 생활정보지의 구인란만 뒤적거리고 있다.
허씨는 지난 10월초까지만 해도 서울 강남지역에서 물류 대기업인 H택배의 수탁업체인 D사의 공동 대표였었다.
사업장이 강남지역에 있다보니 택배물량도 꾸준했고 동업자 3명과 직원 2명 등 총 7명이 합심해 나름대로 열심히 살다보니 D사는 다른 수탁업체에 비해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고 한다.
허씨는 매일 오전 7시면 출근해 밤 9시가 넘는 시간까지 하루 평균 100박스의 물량을 배달하는 고된 생활을 반복했지만, 가까운 미래의 더 나은 생활을 꿈꾸며 하루하루 보람되게 생활해 왔다.
이렇게 직원 6명과 함께 열심히 생활해 온 허씨가 사업을 접고 떠밀리다시피 나왔던 것은 지난 10월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자신의 눈 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허씨가 H사와 계약하고 지난 2001년부터 영업을 해온 지역에 H사가 허씨와는 아무런 상의없이 또 다른 용역업체와 계약을 맺고 버젓이 영업소를 차려준 것이다.
"지난해 9월초께 우리 구역에 본사가 다른 사업자에게 영업소를 차려줄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저랑 상의 한마디 없이 강남지사가 그러한 일을 벌일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H사와 계약을 맺고 4년을 넘게 그 지역에서 사업을 해 왔는데…. 그 배신감은 말로 다 표현 못합니다."
허씨는 자신의 관할구역에 같은 회사의 영업소가 차려지면 영업에 대한 막대한 타격을 받을 것을 우려해 강남지사로 달려가 지사장에게 해명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냉정한 현실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 구역에 H사의 영업소가 생길 것이 확실시 되자 앞뒤 돌아볼 것도 없이 지사로 찾아가 따졌습니다. 그런데 지사장이라는 사람이 눈 하나 까박하지 않고 그 지역이 타 지역보다 임대료가 싸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것을 겨우 진정시키고 그렇다면 왜 내가 모르게 이러한 일을 꾸몄냐고 물으니 계약서상 자신들은 수탁업체에 이러한 사실을 통보할 의무가 없다는 대답만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H사와 허씨가 체결한 '택배 차량위탁 계약서' 2조에 따르면 계약기간 중이라도 '을(허씨)'이 '갑(H사)'의 증차요구를 이행하지 않거나, '을'의 택배영업 및 운송능력 등이 부족하다고 판단될 경우, '갑'은 '을'의 관할구역을 축소하거나 관할구역내 별도의 위탁점 개설 등 관할구역을 조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허씨는 바로 이 조항에 해당됐다.
허씨는 본사의 판단으로 이 조항에 적용돼 아무런 변명거리도 찾지 못하고 길거리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허씨는 이러한 본사의 판단(?)이 결단코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6, 7월께 강남지사에서 차량을 증차시킬 것을 요구해 자비를 들여 7, 8월 2개월간 생활정보지에 광고를 냈지만, 택배 일이 힘들어서 그런지 3일을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일이 반복되더라구요. H사는 계약내용만을 내밀었지만 현실적으로 사람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인데 어떻게 하라는 건지….
설사 사람을 구한다 해도 동업자들이 서로 십시일반으로 자기가 가져갈 몫을 나눠 1인당 인건비 160만원을 주고 나면 남는게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고용한 직원은 160만원을 받는데 우리는 차량유지비, 세금, 벌과금(무단 주정차) 등을 빼고 나면 150만원도 채 안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허씨는 자신들이 본사가 원하는 만큼 영업실적을 올리지 못한 점은 인정하지만 본사의 경영전략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가 관할했던 구역이 본사에서 나오는 물량이 많아 영업(집하물량)에 제대로 신경을 못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는 현장의 게으름 때문이 아닌 본사의 경영전략이 잘못돼 있기 때문입니다."
허씨는 연신 담배를 피워가며 당시를 회상했다.
"언젠가 하루 1백여박스가 나오는 업체와 박스당 2천500원씩 받기로 하고 계약키로 했는데 강남지사에서 계약을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제품이 안경이라 박스 크기도 작은데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박스당 단가가 3천원 미만이라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몇일 후 지사에서 다시 그 물량을 따올 수 있다면 2천500원에라도 따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 업체에 가서 면박만 받고 나왔습니다. 업체 부장이 딱 잘라 말하더군요. '지금 장난하세요'."
그는 이러한 사례가 몇 번 더 있었다고 한다.
허씨는 "다른 택배사는 가격이 떨어지면 곧바로 조절하고, 배송사원에 대한 서비스 교육도 철저히 시키는 걸로 알고 있는데 H사는 서비스 교육도 미진하고 항상 뒤늦게 시장을 따라가 현장영업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H사는 국내에 택배사업을 처음 도입했음에도 불구, 지난해 3위 업체였던 C사와 비슷한 물량을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물량 증가폭이 경쟁사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허씨에 따르면 H사가 영업소 입점 계획을 알린 것은 지난해 초였다고 한다.
"지난해 초 지사에서 서초·강남지역에 각각 1개씩의 영업소를 내 준다며, 사업계획서를 내라고 해서 냈습니다. 영업소에 들어가는 비용을 본사에서 모두 해결해 준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어 사업계획서를 제출했었습니다. 그런데 수탁업체간 경쟁이 심해지고 서로 알력이 생겨 회사에서 강남지역은 보류하고 서초에만 2군데를 몰아 줬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다음 강남지역에 영업소를 낼 때에는 통보를 해 줄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되니 답답할 뿐입니다."
허씨는 본사가 자사 수탁업체간 경쟁을 심하게 시켜 이제는 타사와의 경쟁보다 H사 수탁업체간 경쟁이 더 심하다고 지적했다.
"예전에는 수탁업체끼리 서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고 힘이 됐지만 작년부터는 회사에서 단합대회를 가면 싸움만 합니다. 2002년까지는 관할구역이 아니면 같은 수탁업체간 영업이 금지됐지만 이후부터는 자유롭게 영업을 할 수 있다보니 이러한 현상이 더 심해졌습니다. 물론 건전하게 경쟁을 시켜 기업이익을 창출하려는 본사의 의중은 알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역효과만 났던 것 같습니다."
H사의 직원 출신이었던 허씨의 상실감은 더욱 컸다고 한다.
허씨는 지난 1998년 H사에 임시직으로 입사해 이듬해인 1999년 정직원으로 근무하면서 큰 돈은 벌지 못했지만, 조금씩 적금을 부으며 성실하게 생활해 왔다.
"2001년 8월께 회사가 경쟁력을 강화한다며 배송직원들에게 차량을 불하해 주며 구역을 할당해 줄테니 위수탁계약을 하자고 해 같이 근무하던 직원들과 의견을 모아 계약을 하게 됐습니다. 이후 3년간 일요일만 쉬고 하루 14시간씩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결과가 이렇다 보니 속았다는 생각에 한 숨만 나옵니다."
"나올 때도 마음대로 나오지 못했어요. 지사에서 업무 인수인계를 하지 않고 나간다면 그 기간동안 사용하는 비용을 모두 청구한다고 해서 2주일간 인수인계를 해주고 나오려고 하니 '포기각서'를 쓰라고 하더군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허씨는 수탁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허씨는 택배 배송일이 정말 힘든 일 중 하나라고 한다. 아침 일찍 나와 하루종일 쉴새 없이 물품을 배달하다보니 배송사원 중 살찐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라 한다.
택배 배달직이 평소에는 12∼14시간 정도 일하지만 명절 때만 되면 보름간 하루 평균 17시간 정도 배달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허씨는 또 다른 택배사에 취직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군 제대후 10여년간 화물운송 관련 일만 하다보니 다른 직업을 찾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수탁업체 그만둘 때에는 정말 다시는 택배 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3개월 정도 놀다보니 다른 직업을 찾을 수가 없더군요. '배운게 도적질'이라고 택배 밖에 잘할 수 있는게 없는 것 같아요. 앞으로 열심히 살겠지만 수탁업은 정말이지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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